바로크식 건물에 빛의 실루엣 입힌 국립극장. 오페라와 발레 공연이 열리는 곳이다. 오른쪽엔 혁명전 국회의사당인 까삐똘리오 정원이 보인다.

국립극장과 까삐똘리오 사이, 글씨 희미한 떼아뜨르가 이정표다. 골목 접어들기 바쁘게 요반나 까사 팻말이 발목을 붙들고, 유리창 두드린 순간 몇 만 년 전부터 기다렸다는 듯 철커덕 소리가 여행자를 끌어들인다. 도미토리라면 굳이 주인이 아니어도 문이 알아서 손님을 맞아들인다는 뜻이다. 허리짬 푹 꺼진 침대 3개와 낡은 소파, 원탁에다 의자 몇 개가 가난한 여행자 쉼터다. 쉰 살 요반나가 얼굴 내밀지 않는 건 꾀죄죄한 여행자 배려 차원인 것 같다. 주인이 자리 비운 틈을 얼굴 뽀얀 며느리가 메우고 있다. 그녀 또한 방

청소며 빨래며 식사 준비하느라 여행자 행색 살필 겨를이 없다. 혼돈 속 질서인 카오스, 여행자 중에 터줏대감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구도다. 구레나룻 텁수룩한 중년 남자가 선뜻 앞으로 나선다. 인심 후하게 생긴 그는 처음 발 들인 여행자에게 폰부터 꺼내서 지도 앱을 켜라고 명령한다. 눈앞에 펼쳐진 지도를 확대하라고 한 뒤, 다음 블록 골목을 뭉툭한 손끝으로 가리킨다.

“배고플 거 아니냐고, 그럼 여길 먼저 가야겠지? 오비스뽀 거리보다 질은 떨어지지만 가성비 최고라구!”

폰이 초보 여행자를 좀비로 변신시켜 뒷골목으로 끌고 간다. 그가 빠져나간 도미토리, 수면 안대 낀 여행자는 잠을 청하고 나머진 책과 눈싸움을 시작한다. 이십 여분 뒤, 자신감 넘치는 노크 소리가 도미토리를 뒤 흔든다. 창가 침대를 차지했던 여행자가 부스스 일어나 문을 연다. 사람보다 먼저 모습을 보이는 건 피자며 음료수와 맥주다. 그걸 앞세운 초보 여행자 입이 길게 찢어진 게 유난스럽다. 좀비의 탈을 벗었지만 조심스레 걸음 옮기는 그, 손에 들린 먹거리를 테이블이 살포시 받아든다. 먹을 게 그득하지만 여행자는 선뜻 입에 넣질 못해 머뭇거린다. 한국인 특유의 인정이 그의 손놀림을 막아선 탓이다. 그럴 때쯤 터줏대감 굵직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눈치 볼 필요 없다니까! 배불리 먹고 나서, 쓰레기통에 넣고, 테이블 닦아놓기만 하면 돼!”

그때서야 초보 여행자는 눈을 힐끔거려가며 허기를 채워나간다. 자리에 누운 사람은 조금 전 연극 모드로 돌아가고, 소파에 기댄 터줏대감은 사진 잡지를 뒤져가며 출사 장소 물색하느라 바쁘다. 무언가 생각에 빠져 있던 그의 혼잣말이 도미토리를 유령처럼 떠돈다.

“작년에, 눈동자가 허공에 붙박이 된 사람을 둘씩이나 봤거든. 귀국해서 작업하다보니 그 모습이 자꾸 선명해 지는 거야. 어떻게 여길 다시 안 올 수 있겠어?”

예술가의 무한궤도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나 보다. 무모하게 발들인 곳에서 걸작이 태어난다는 걸 암시한 그. 낯선 풍경 찍으려면 아이들에게 줄 자그마한 선물이 필요하다고 웅얼거린다. 남자 아이에겐 풍선, 여자애에겐 머리핀이 제격이라면서.

도미토리 벽엔 여행자를 위한 메모가, 탁자 위엔 여행 후기 노트 몇 권이 얹혀 있다. 간혹 일본인이 적어둔 글도 있지만 그림이 곁들여진 탓에 굳이 일어를 알 필요가 없다. 그림 지도를 더듬어 다음 여행지 정하는데 참고하면 되니까. 한글이며 일어 모르는 요반나도 그걸 펼쳐 설명하는 걸 보면 어학 실력과 여행 후기 읽는 건 아무 상관없다. 무관심한 듯 하면서 손님 가려운 곳을 척척 알아내는 그녀. 쿠바나가 틀림없는 요반나지만 세심한 그녀에게서 한국 아줌마가 언뜻 연상된다. 입가에 미소 머금은 요반나가 내 맘을 들여다본 듯 도미토리 문을 왈칵 연다. 양반되긴 틀려먹은 그녀, 전화기부터 성큼 집어 든다. 내일 오기로 한 마끼나 택시 기사에게 땍땍거리며 전화를 건다. 톤을 일부러 높이는 걸 보면 실수하지 말라고 겁주려는 게 확실하다. 그런 뒤 손님들에게 더 필요한 게 없는지 좁은 실내를 휘둘러본다. 식사하던 초보 여행자 오물거리던 입이 딱 멈춘다. 그녀가 주인이란 걸 알고 배낭을 열어 뭔가를 꺼낸다.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과 봉지 커피 몇 개다. 돋보기 낀 그녀가 봉지를 당겨 포장지 도안을 살핀다. 바깥에 그려진 그림만으로 속에 든 걸 꿰뚫어 보는 육백만 불의 수퍼우먼. 귀한 거라 판독했는지 그라시아스! 하며 서랍장에 감춘다.

쿠바의 첫날 밤, 왠지 두근거린 탓에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까사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올라간다. 국립극장에다 까삐똘리오를 수놓는 별빛이 상드리에처럼 반짝거리며 여기가 바로 유토피아라고 알린다. 발레며 오페라 공연이 열리는 국립극장이 간접 조명으로 곱게 몸단장한 모습에 오소소 떨린다. 바로크식 웅장한 건물에 입혀진 빛의 실루엣, 그걸 보고도 온전히 잠 이룰 사람이 있을까. 아침이면 카리브해에서 떠오르는 해를 찍기에도 그저 그만일 것 같다. 그 땜에 사진작가가 요반나 도미토리를 베이스캠프로 정했겠지. 쿠바 어디라도 훤히 꿰고 있는 요반나가 곁을 스쳐 지나며 불편한 건 없는지 넌지시 묻는다. 부처님 손바닥 위 손오공처럼 여행 내내 그녀 푸근한 치마폭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