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 논설위원 / 중원대 교수

(김택 논설위원 / 중원대 교수) 과거의 역사를 오늘의 눈으로 평가하는 것은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 시대의 환경 여건 정치적 상황 등을 자로 재단하듯 하나로 해석하는 것은 자칫 오류를 낳기도 한다. 우리는 최근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해서 박물관 건립중단이나, 우표발행중지같은 상황에 대해 정치적 판단을 통해 결정하는 것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역대대통령으로서 국민적 평가를 보면 박정희가 가정 직무를 잘 수행했다는 사실에 공과를 인정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근현대사를 통해 대한민국 근대화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절치부심했던 인물은 그래도 박정희였다. 100년 전 1917년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난 그는 조국 근대화의 영웅이라는 빛을, 무자비한 독재자라는 그림자를 동시에 받았다. 그의 평가가 공과 과로 엇갈리고 있지만 그는 가난한 우리나라를 중산층의 나라로 변모시켰고 현재 세계 12위의 경제대국 테크날로지의 으뜸 국가로 만든 것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우리는 많은 혁명가를 보지만 그들의 말로는 초라하다. 쿠바의 카스트로,이집트의 무바라크, 리비아의 카다피, 필리핀의 마르코스,소련의 스탈린,칠레의 피노체트 등 많은 독재자들은 박정희처럼 국가번영을 이루지 못하고 추락했다. 해방 후 좌우합작 남로당의 발호 등 혼란의 시대였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부정선거로 국민적 공분을 샀다. 그 후 윤보선 장면정권의 민주당은 허구헌 날 시위로 혼란만 가중됐다. 박정희 5·16 주체들의 주 임무는 아마도 혼란을 몰아내고 질서체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권력탈취에만 매몰되지 않고 국민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에 관심을 돌렸다. 이 당시 최대과제는 빈곤탈출이었다.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하고 집권할 때 우리경제사정은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1979년 1647달러나 성장했다. 한국전으로 인해 국가경제시스템이 마비된 구걸국가였고 오징어나 김을 수출했던 보잘 것 없는 나라였다. 봄이면 보릿고개 겪었던 우리 아버지세대는 희망이 없고 무기력 패배감 그 자체였다.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하면 된다. ‘잘살아보자’는 정신운동을 통해 가난을 단절하기 위해 노력했다. 가난한 나라에서 중진국으로 발전하기 위해 그는 교육도 공업과 기술을 강조했고, 이병철, 정주영, 김우중 등 기업인을 통해 수출드라이브정책을 초지일관했다. 못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국가라는 오명을 들으면서 일본에 차관을 빌려 포항제철을 준공하였고 정치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한 것도 그의 강력한 리더십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치밀하게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짜서 국가발전을 주도했다. 수출주도의 고도성장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그는 기업인들에게 공장 짓고 이윤 창출하도록 독려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신념과 의지로 대한민국은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고도성장을 하였고 한강의 기적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평가는 아직도 공보다는 과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첫째, 민주주의와 인권을 탄압했다는 주장이다. 박정희시대 국가발전을 위해 억압과 공포정치가 있었던 점은 유감이다. 유신헌법의 긴급조치, 김대중 김영삼 야당정치인의 납치나 탄압, 민주인사의 인권탄압 등 암울했던 대한민국의 시기였던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둘째, 부정부패의 양산이다. 정경유착의 비리, 관경유착, 군경유착, 관언 유착 등 박정희시대나 지금도 이런 부패로 인해 국가투명도를 악화시키고 있다. 인허가상의 편의, 정통성 없는 군부정권들의 관료부패 용인, 국가발전의 윤활유역할을 했던 부패가 어느 정도 용인된 사실은 과라고 볼 수 있다.

셋째, 권력기관들의 공포정치로 인한 국민들의 탄압이다. 국정원, 검찰 경찰 국세청 감사원 등 권력기관들의 작동이 시스템에 의하지 않고 정권의 하수인처럼 남용하며충견노릇을 한 것은 국민들의 지탄을 받을 소지가 충분했다. 행정민주주의 시스템을 망각한 권력시스템의 적폐가 지금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18년 통치기간 대한민국이 산업화의 초석으로서 발전시킨 것은 그 공을 낮게 볼 수 없다고 본다. 돈이 없어 머나먼 독일에 광부로 간호사로 간 우리 아버지 세대, 어마니들이 한 푼 두푼 모아 고국에 송금한 그 눈물어린 돈들이 한국을 기적으로 탄생시킨 원동력이었다. 1964년 서독 함보른 탄광에서 박정희와 육영수는 광부 간호사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도 가난한 조국을 살리기위해 여러분께 이 한 몸 헌신하겠다는 지도자의 눈물이었으리라! 민족중흥이라는 경제성장을 해야 했던 박정희시대 의 지상과제가 정치민주주의 억압비판에 공과가 가려져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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