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 논설위원 / 침례신학대 교수

(김주희 논설위원 / 침례신학대 교수) 고양이는 억울하겠다. 또 무서웠겠다. [고양이대학살]에는 고양이 수난사를 담고 있다. 18세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의 민중사를 다루는 로버트 단턴의 글에 보면 출판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인 출판사 사장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고양이를 학살했다는 고양이 대학살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비인간적인 환경의 노동자들은 자기네 삶이 부르주아가 기르는 애완고양이보다 못하다는 데서 폭발, 보복하는 방법으로 고양이를 살해한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주인의 고양이를 죽였지만 마침내는 모든 고양이들을 잡아다가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의례를 열면서 없앴다.

고양이를 재판대에 올리는 연극형식으로 부르주아를 모욕하고, 당시 고양이에 대한 성적 상징들을 이용해 부르주아 부인을 조롱하기도 한다. 폭력으로 표출된 울분들은 나중에 오는 프랑스의 대혁명의 배경으로 보기 한다.

대혁명 전 계몽주의 시대를 다루는 이런 미시사 해석에 대해 과하다거나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나, 따로 고양이는 무슨 죄로 혁명을 일으킬만한 미운 에너지를 온 몸에 받아가며 죽어야 했는지 물을 수도 있으리라.

내가 자란 동네에서도 고양이는 억울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고양이가 요물이라고 들으며 자랐던 것 같다. 사람 말을 다 알아듣는다고 사람이 피 흘린 걸 핥아먹으면 고양이가 귀신이 된다고 어릴 때 동네 언니 오빠들은 목소리까지 낮췄다. 낮말을 알아듣고 밤 말을 듣는다는 새와 쥐보다 고양이 이야기는 더 신비했다.

마음 속까지 들여다보고, 거짓말이라도 하면 금새 알아챌 것 같은 신통력이 고양이에게 들씌워졌다. 거기에 어울리게도 고양이는 사람들 곁으로 쉬이 다가오지도 않으면서 훌쩍 담을 타 넘기도, 스며들듯 소리도 없이 나타나기도 했다. 고양이 몸놀림은 강아지의 천진난만한 촐랑거림이나 병아리의 오종종한 귀여움과 거리가 있기는 했다. 날렵하고 가벼운 바람같아서 신비하기도 했다.

그러니 졸음이 올 때의 눈빛이 사랑스러운지, 발바닥이 분홍빛 찹살떡 같이 말랑거리는지 어쩐지, 알아 볼 엄두 낼 새도 없이 고양이는 반쯤 귀신이거나 요물이거나 했다.

고양이는 우리와 함께 살지만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집 안에 들여 고양이를 기르는 집은 없었다. 미워하지도 이뻐하지도 않으면서 한 동네 살고, 어느 집에서 일부러 불러들여 밥을 먹이거나 하지는 않지만 어느 틈에 슬그머니 우리들 주변에 있었다.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고 없지만 어느 순간 보이기도 하는 그런 짐승, 그래서 그냥 객관적이기도 요물이기도 한 짐승이었다. 어떤 이데올로기와도 같은 고양이는 정말 억울하겠다.

가까이에서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발견시킬 기회를 원천봉쇄 당할 뿐 아니라 멀리 쫓겨가야 하는 위험까지 떠 밀리는 것이므로.

아이는 고양이를 기르고 싶다고 했다. 어느 때는 애교를 섞어, 어느 때는 눈물방울을 툭툭 떨구면서 집에서 기르게 해달라고 했다. 어릴 때는 산타클로스가 강아지를 선물로 주게 해달라고 기도도 했었다고, 아무리 기도를 해도 산타도 부모도 강아지 선물을 주지 않더라고도 했다. 동물까지 기르기는 안되겠다고 눙쳐 넘겼다. 별달리 어릴 적 편견을 깰 기회도 노력도 없던 처지에 선선히 집 안에 들이기는 난망스러운 일이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잘 길렀다. 자주, 열심히. 교문 앞에 파는 병아리도, 피아노 선생님네서 분양받은 고슴도치도 열심히 목욕시켜가며 길렀다. 먹다 둔 은행에서 싹이 난 걸 심어도 아이가 돌보면 나무로 자라나기도 하기는 했다. 아이 이야기 속 고양이는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동물이고, 각인된 고양이는 요물, 책으로 학습한 고양이는 상징성 때문에 조롱받고 떼죽음 당한 가엾은 목숨들이다. 편견없는 아이는 귀엽다고 기르자는데 어쩐 사설들이 이리 떠오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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