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환경관리본부장 서강덕

(동양일보) “지금 어디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분이 계시옵니다. 그 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조병화 시인의 의자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이 시를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때다. 다음 세대를 위하여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자리를 비워주겠다는 아주 당연한 내용이었기에 그때에는 이 시에 대한 감흥(感興)을 몰랐다. 그런데 인생의 나이테가 늘어나면서 이 시의 메시지가 점점 내 가슴을 파고  들었다. 도대체 자리가 뭐 길래 사람들은 그토록 지키려 하는 것인지.
처음 엄마 품을 떠나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을 교실 밖 복도에 한 줄로 세워 놓고 차례로 이름을 부르며 자리를 정해 주셨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생긴 내 자리였다. 함께 앉을 짝꿍도 생겼다. 어색했지만 또 다른 친구를 만났다는 기쁨이 무엇보다 컸던 호기심 많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오래가지를 못했다. 서로에게 익숙해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자리다툼이 시작되었다. 몇 몇 힘센 녀석들의 일방적인 선전포고로 책상은 38선처럼 반으로 갈라지고 조금이라도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려는 놈과 지키려는 놈 사이에 자리다툼은 끊이질 않았다. 힘이 약한 녀석들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좁은 공간에서 한 학기를 보내야만 했다. 하루빨리 짝꿍이 바뀌기만을 바라면서.
육거리 시장은 새벽부터 분주하다. 물건을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의 흥정하는 소리가 정겹다. 노점상들은 멍석 반 닢도 안 되는 좁은 자리에 전을 펴고 앉아 물건을 판다. 리어커에서 생선을 파는 중년남자, 포장마차에서 어묵과 떡볶이를 파는 젊은 부부, 그리고 시장통 모퉁이에서 채소 몇 무더기를 펼쳐놓고 하루 종일 앉아 있는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새벽을 여는 시장사람들의 숨소리는 참으로 다양하다.
비록 시장바닥의 좁은 자리일 망정 이들에게 그 자리는 무엇보다 소중했을 것이다. 그 자리 덕분에 자식들 공부도 시키고 딸린 식구들 모두 먹고살지 않았던가. 아무리 큰 집에 살아도 내가 편히 누워 쉴 수 있는 자리는 한 평 이면 족하다.
우리나라 청년실업이 사회문제가 된지는 이미 오래다. 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하여 자리를 잡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3년이 걸린다고 한다.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자리를 잡아도 일을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다시 그 자리를 비워주어야 한다. 기업들이 인건비를 줄이고 노사분규를 피하기 위해 비정규직을 반복적으로 고용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열정과 창의가 있을 리 없다. 그저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안정된 일자리가 절실할 뿐이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난79년 빡빡 머리의 고교 재학중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척박한 환경 속에서 공직이라는 울타리에 들어와 군대를 거쳐 일자리를 얻었고 이제 어느덧 천직이 되어 버린 40년간의 공직생활이 마무리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조직 속에서 자리를 잡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철없던 시절 말단 행정9급을 시작으로 팀장, 과장을 거쳐 국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과분한 영광을 누리고 있다. 지난 7월부터는 환경관리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행정직으로서는 다소 생소한 기술파트 업무를 맡고 있는데, 나에겐 새로운 자리는 언제나 도전이고 가슴 뛰는 일이다. 큰 욕심 내지 않으리라. 내 몸 지탱하고 삶의 품격과 가치를 지킬 수 있는 낮은 자리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리를 갖고 살아간다. 그런데 자리는 수직적인 조직을 전제하는 만큼 높낮이가 있다. 명예나 권력, 부를 담보하는 높은 자리는 누구에게나 선망(羨望)의 대상이다. 사회 통념상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잘 살았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몇 안 되는 높은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을 한다.
그 중에는 정당하게 경쟁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도 있지만, 탐욕에 눈이 멀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산 정상을 오르면 내려와야 하듯이 높은 자리에 오르면 언젠가는 내려와야 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고 순리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답다’는 어느 시인의 말(言)처럼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는 영원히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새벽녘 서두른 출근길, 각자의 자리를 찾아 이동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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