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시인

(나기황 시인) 최근에 몇몇 지인으로부터 TV에서 필자를 보았다며 재미삼아 건네는 인사를 받았다.

아니, 본인도 모르는 TV출연이라니. 얘기를 듣고 보니 짐작 가는 데가 있다.

얼마 전 <명견만리>라는 TV프로그램에서 한 친구의 ‘IMF 이후 20년’이란 인생역경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과거 직장동료로서 함께 겪었던 소회를 한 두 마디 보탠 것이 자료화면으로 나온 모양이다.

아무튼 잊고 지냈던,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IMF가 ‘20주년’이란 타이틀을 달고 다시 아픈 기억 속으로 소환된 셈이다.

20여 년 전, 1997년 11월 21일, 듣도 보도 못했던 ‘IMF외환위기’가 한반도를 강타했다.

‘외환’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절에, 역시 낯선 이름의 국제통화기금(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에 국가부도사태를 면하기 위해 ‘구제 금융’을 신청했던 충격적인 사건이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세대에게 ‘IMF외환위기’는 가슴 먹먹한 통증으로 다가오는 ‘트라우마(trauma)’다.

“소슬한 바람이 붑니다/ 겨울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미처 떠나지 못한 낙엽들이/ 공원 한 켠으로 비켜서고 있습니다// 벤치 끝에 앉아 있는/ 40대 가장의 낡은 외투 깃이/ 너무 추워 보입니다/ 뿌옇게 흐려오는 시야에/ 부양가족들의 얼굴이 흔들리고/ 연체독촉장 같은 조바심에/ 몸보다도 마음이 먼저 시려옵니다/ 먼지 낀 구두 끝을 문질러 보지만/ 갈 곳도 만나 볼 사람도/ 마땅치 않아 보입니다// 또 하루가 지나고 있습니다/ 봄은 아직도 멀리 있는 모양입니다” (졸시,<겨울편지>전문)

IMF 구조조정의 첫 타깃(target)은 금융권이었다.

근무하던 직장이, 더구나 은행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하루가 멀다 하고 ‘퇴출’이니 ‘합병’이니 하는 흉흉한 소문들이 돌더니 급기야 ‘구조조정’의 칼날이 턱 끝을 겨누면서 IMF는 ‘공포’ 그 자체로 다가왔다.

수많은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했고, ‘이 땅의 아버지’들이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어 거리로 내몰렸다. 알 수 없는 분노와 절망감이 사회전반으로 퍼져나가고, 급기야 가족이 해체되는 지경에 이르러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당시 정년을 앞두고 있던 직장 선배의 말이 잊혀 지지 않는다.

생존이 불투명한 전시와 다름없었던 때인지라 ‘정년퇴직’이 주는 무게감이 달랐다. 선배의 지론인즉슨, “정년퇴직을 하려면, 첫째는 건강이고, 둘째는 사람, 셋째는 실력이다. 정년까지 가려면 우선 건강이 받쳐줘야 하고, 주위 사람을 잘 만나야 사고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업무실력은 물론이고 경쟁에서 밀리지 않을 뭔가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당시 IMF상황에서는 ‘해당사항 없음’에 해당하는 빈말에 불과했다.

올해로 IMF 20년, 국가부도라는 치욕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대한민국 호’는 기적적으로 탈출했고 살아남았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204억 달러에 불과했던 외환보유액이 2017년 10월 말 현재 3844억 달러로 몸집이 불어났다.

IMF외환위기를 용케 벗어났다고 해서 IMF가 이제 우리와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IMF는 ‘살아남은 자’의 아픔까지 들여다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거대한 담론이며 한 시대의 문화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서 현재진행형의 아픈 유산이며 삶의 기록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IMF20년 세월을 희화(喜化)하거나, ‘금 모으기’까지 했었던 지난 추억쯤으로 돌려선 안 된다. 상상도 못할 지독한 시간을 보냈던, 그리고 아직도 그 후유증을 앓고 있는 내 형제, 내 이웃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이며 예의이기 때문이다.

사실, IMF 외환위기로 부터 20년, 지금의 대한민국은 정말 안녕 하신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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