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영 서원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옥화구경 끝자락인 신선봉 기슭 박대소 근처에 작은 밭뙈기 하나가 있다. 조그만 농막의 은행나무 밑에 튤립과 맥문동을 심어 놓고 행와(杏窩)라는 이름으로 불러 보기도 했다. 그러나 궁벽스러울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편의시설마저도 갖추어지지 않아 찾아오는 이가 별로 없다. 어찌 보면 궁상맞은 꼬락서니로 버려진 듯한 곳이기도 하지만, 무성한 잡초 속에 가끔씩 반딧불이 날고 집 앞 시냇물 소리 나직이 속삭이는 밤이면 나만의 청정무구한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청주에서 이곳으로 오려면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어린 시절에 이주해 와서 성장한,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의 고드미 마을 입구를 지나게 된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 길을 지나던 중 자주 단재 선생의 옛 집터에 들러서, 버려진 듯 외로이 서 있는 비신(碑身)에 손을 얹고 눈을 감은 채 스스로 범부의 속된 삶을 책망하곤 했었다.

민족의 사표가 될 만한 인물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장소는 후손들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기 마련이다. 고드미 마을이 바로 그러한 곳이다. 그러나 정작 가까이 살고 있는 우리 자신조차 그러한 인물과 장소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여 왔는지 되짚어 보아야 한다. 뒤늦게나마 고드미 마을은 단재 선생의 묘소와 사당, 사적비, 기념관 등을 그런대로 정비하여 모양새를 갖추었기에 지금은 새로이 민족정신 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게다가 ‘단재로’나 ‘단재교육연수원’과 같은 명칭 사용도 효과적이고 문화해설사의 설명도 유익하다. 이처럼 점점 개선되고 있으나 아직도 단재 선생의 민족혼을 가르치고 홍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여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고 있다.

우리 고장에 이처럼 아쉬움이 서려 있는 곳이 어디 고드미 마을뿐일까. 3.1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 의암 손병희 선생의 생가 역시 우리가 늘 지나다니는 길가에 있지만,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또한,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해외에서 떠돌아다니며 외교활동으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다 망명지에서 순국한 보재 이상설 선생 생가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이들은 모두 풍찬노숙의 삶으로 독립의지를 불태운, 우리 민족의 영원한 스승이시다. 뒷사람들은 이분들의 삶과 정신을 계승하여 스스로 조국애와 민족애를 함양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당국에서 충분히 예산을 배정하여 구체적이고 효율적인 사업을 꾸준히 벌여 우리 고장의 문화유산이 민족정신 교육과 관광을 아우르는 전국적인 명소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단재 선생은 민족사학자이며,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로서 우리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예전의 기록을 보면 한 국가의 주체를 민족으로 보고 민족주의를 통해서 독립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단재 선생의 사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그 사상의 바탕에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과 인의(仁義)를 실천하는 선비정신이 깔려 있다. 이러한 사상과 정신은 선생의 어린 시절에 바로 이곳 고드미 마을에서 싹튼 것이다.

고드미라는 지명은 항상 곧은 말로 상소를 올리다가 불이익을 당했던 선비가 이곳에 숨어 들어와 살면서 여러 번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던 연유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는 마을 주변에 곧게 늘어선 산등성이의 모양에서 비롯된 ‘곧은 산’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쨌든 두 가지 이야기가 모두 곧고 바르다는 의미를 공유하고 있으니 이 지역이 선생과 같은 올곧은 지식인을 배출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민족사학자 단재 선생은 고대사 연구에 독보적 행보를 보여 주신 분으로서 중국 대륙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유적을 답사하며 역사를 바로 세우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집안현 유적을 답사하면서는 잡초 더미에 묻혀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훼손을 안타까워했다. 더욱이 비문의 삭제와 위조로 인해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이 가려지는 심각한 역사 왜곡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아야만 했다. 선생의 묘소 앞에 서면 만주 벌판의 칼바람 속에서 우리 문화유적을 찾아 홀로 헤매는 모습이 애처롭게 떠올라 다시금 고개가 숙여진다. 그래서일까. 아직까지 선생의 의기와 기상에 걸맞은 모습을 갖추고 있지 못한 고드미 마을에서는 고구려 옛터를 혈혈단신 떠돌던 망명 지식인의 외로움에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그리고 선생이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고시 한 구절이 떠올라 망명 독립운동가의 고뇌 가득한 심경으로 함께 젖어들게 된다.

열 해를 갈고 나니 / 칼날은 푸르다마는 / 쓸 곳을 모르겠다. / 춥다 한들 봄추위니 / 그 추위가 며칠이랴. / 자지 않고 생각하면 / 긴 밤만 더 기니라. / 푸른 날이 쓸 데 없으니 /칼아, 나는 너를 위하여 우노라.

독립운동가로서 한말의 소용돌이와 일제강점기의 암울함 속에서 비운의 삶을 살다 가신 단재 선생은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란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역설했다. 이는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역사란 무엇이뇨?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돌아서는 나의 등 뒤에서 ‘천고(天鼓)’의 울림처럼 선생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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