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아메리카 풍습인 성인식을 치르기 위해 야외촬영 중인 아가씨. 열 다섯 살이 되면 스스로 모든 걸 책임진단 뜻으로 성대한 행사를 벌인다.

캠프 참가자 중 유난히 시선을 끈 콜롬비아 아가씨 마리안나, 그녀랑 얘기 나누던 디에고에게 물으니 열네 살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걸맞지 않게 성숙한 탓에 곁을 스치기에도 조심스러웠고, 이름 대신 나이에 맞춰 까똘쉐라 불렀다. 그 애와 가까워진 건 트랙터를 타고 가서 자갈밭 고른 뒤부터다. 남자는 바윗덩어리를, 여자는 자갈을 골라내 트랙터에 실었다. 돌을 거의 다 주워내고 나니 관리인이 속에 박힌 바위를 캐내라고 지시했다. 일이 맡겨지면 썰렁썰렁 못하는 성격 탓에 나뭇가지를 지렛대 삼아 바위를 캐냈다. 그런 뒤 거들었던 팔레스타인 청년과 스위스 군 출신 남자 등 두드려주고 우렁차게 한국민요 부르는 걸 지켜봤나 보다. 트랙터 타고서 캠프에 복귀할 때 그 애 시선에 일렁거리던 미소, 짐칸에 빼곡하게 서서 밀고 밀치는 동안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고 나서부터 마주치기만 하면 수줍게 웃곤 했다. 그 애와 마주 앉은 식당, 주머니에 넣어 뒀던 궁중 예복 책갈피를 선물했다. 보잘 것 없는 걸 받아 든 그 애,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소녀가 틀림없다.

마리안나 삼촌 디에고로부터 콜롬비아 풍습을 알게 됐다. 내년이면 그녀가 성인식을 치를 거라고. 여자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는 성인식은 결혼 못지않은 큰 행사다. 그건 라틴 아메리카 어디서나 관습이 된 지 오래다. 수녀가 되더라도 성인식을 치러야만 가능하다니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 친구랑 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신부 의상을 갖춰 입고 성인이 되었다는 걸 자랑할 마리안나, 한창 꿈을 키워야 할 나이에 엄마가 걸었던 길을 쫓을 거라 생각하니 씁쓸한 생각에 이어 떠오른 상념들이 지워지지 않았다.

마리안나와 함께 했던 작년과 달리 브리가다 캠프를 빠사까바요 호텔로 옮겨 갔다. 노동절 연휴를 맞아 안토니오 메야 캠프에 일 할 사람이 없어 그런 모양이다. 중부지방 산타 클라라 가까이 자리한 호텔. 바다 건너 작은 섬을 끼고 넓고 아기자기한 수영장도 갖추고 있다. 삼백 명 대원들을 위해 첫날은 환영식을 겸한 연회가, 마지막 날 밤에는 환송식이 열렸다. 하루만 제외하면 연이어 파티가 벌어진 것이다. 어쩌다 보니 짝을 짓지 못해 독방을 쓰고 있는 나. 술이며 시가, 춤과 노래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쿠바의 일상이 지나치게 심심할 수밖에 없다. 낯선 일상과 맞닥뜨릴지 모른단 생각에 수영장으로 갔지만 채식주의자 라니와 리나가 어울려 노는 걸 방해하는 것 같아 되돌아왔다. 술을 마셔볼까 하다가도 날씨가 더워 엄두가 나질 않는다. 어쩌다 칠레 팀에서 팔을 잡아끌기도 했지만 매번 빈대 붙는 것도 염치없다. 시끌벅적한 호텔에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몇 번이나 읽었던 프랑스 혁명사를 다시 펼쳤지만 몰입이 되지 않는다. 손톱, 발톱을 깎고 거스러미를 꼼꼼하게 다듬고 나서 귀를 후빈 뒤 시계를 봐도 바늘이 한 곳에서 멈춘 것만 같다. 호텔 로비며 정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거나 사진을 찍어도 도대체 시간이 흘러가지 않으니 미칠 지경이다. 프로그램에 적힌 몇 가지 견학 행사도 간략하게 진행되거나 취소되어 무료함을 더했다. 이럴 땐 철천지원수가 나타나도 얼싸 안을 것만 같다.

적적함을 달래라고 그러는지 햇볕에 달궈진 정원을 소나기가 쓸고 갔다. 비 온 뒤 맑음을 수정 육각기둥으로 눈을 가린 것 같다면 믿을 사람 있을까. 물 위에 찰방거릴 햇살도 유기농일까 싶어 수영장으로 나갔다. 묘한 설렘이 나를 끌고 간 풀장 가장자리엔 일본 아가씨 게이꼬 혼자 손을 담그고 있었다. 공백을 메우려는 듯 낡은 승합차 소리가 들리고 방송용 카메라를 맨 남자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뒤따라 차에서 내리는 남자와 여자 둘. 앳된 여자 모습이 콜롬비아 까똘쉐 마리안나 같았다. 풀장으로 향하는 아가씨 의상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작품 사진을 찍으러 온 게 틀림없을 거라면서 먼발치서 그들 행동을 지켜봤다. 웨딩드레스만큼 화려한 의상 덕분에 결혼 앞 둔 커플의 야외 촬영이랑 흡사했다. 한 가지 모자랐던 건 두리번거려도 보이지 않는 신랑이었다.

김득진 작가

그때서야 열다섯이 되었을 마리안나 생각에 이어 디에고 얘기가 떠올랐다. 라틴 아메리카에선 결혼식보다 중히 여겨 무리를 해서라도 성대하게 치른다는 낀세 아녜라, 나이의 벽을 훌쩍 뛰어 넘어 낀세가 된 콜롬비아 아가씨 마리안나도 성인식을 치렀을까. 운동화를 벗어 던지고 하이힐을 갈아 신었을 그녀. 인생의 소품 하나 바꿨을 뿐인데 키가 훌쩍 커져 얼마나 더 성숙해 보였을까. 어떤 색깔 신발을 맞춰 신고 누구랑 짝 맞춰 춤추었을까. 꿈비야, 메렝게, 께브라디따, 노르떼뇨며 단손에 이어 블루스로 피날레를 장식했을 그녀의 춤은 얼마나 멋졌을까. 성인식에는 친구들 몇 명이나 초대 했을까. 가난한 형편에 친구 모두에게 그녀와 똑같은 드레스를 맞춰주긴 했을까. 올해도 캠프에 참여할까봐 가져간 펜을 조몰락거리며 가난에 찌들어도 올곧은 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길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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