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햇살에 지친 영혼까지 적셔주는 망고. 쿠바 어디서나 감또개처럼 발에 채인다.
김득진 작가

따가운 햇살에 뺏긴 수분 보충에는 열대 과일이 으뜸이다. 그 중 메마른 영혼까지 적셔 주는 건 망고밖에 없다. 쿠바 여행하며 가장 즐겨 마신 음료도 망고주스다. 한국에선 참아내는 버릇을 들였지만 햇살이 정수리를 쫓아다니는 쿠바에선 목마름을 견디다간 탈진하기 쉽고, 갑자기 생긴 갈증 땜에 눈앞이 하얘진 게 한두 번 아니다. 허겁지겁 입에 넣은 사탕은 침이 말라버렸으니 녹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한국식 갈증 해소법은 쿠바에선 통하지 않는다는 게 증명된 거다.

브리가다 캠프 입소 후엔 유기농 채소를 많이 먹었더니 갈증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침 식사 마친 뒤 농장 체험하러 갈 거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몰려나오는 대원들은 작업복에 모자와 장갑, 토씨까지 낀 차림이었다. 나는 아무런 준비 없이, 물 한 병조차 지니지 않은 채 그들을 뒤따랐다. 알록달록한 차림의 대원들이 주차장으로 모여들었다. 거긴 폐차장에서 훔쳐온 것 같은 트랙터가 시커먼 매연을 내뿜으며 대기하고 있었다. 관리인이 대원들에게 짐칸에 올라타라고 소리쳤고, 트랙터에서 들린 쇠 부딪치는 소리가 조용한 캠프를 마구 흔들었다. 깨지는 소리와 울컥거림으로 출발을 알리며 트랙터는 비포장도로를 흔들리며 나아갔다. 바퀴 덜컥거림과 엔진의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진 짐칸, 일상이었던 흔들림에 익숙해진 대원들은 무표정하게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트랙터가 달리는 속도는 자전거랑 비슷했고 흔들리는 난간을 잡고 선 느낌은 묘했다. 보이지 않는 군대를 사열하는 느낌을 받으며 내려다보는 대지는 적막에 싸여 있었고, 소나 말은 사열 중인 줄도 모르고 부지런히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런 움직임조차 없었더라면 벽에 걸린 풍경화 액자를 보는 착각에 빠졌을 게 틀림없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넋 놓아 혼이 빠졌을 무렵, 누군가 주먹으로 정수리를 탁 때렸다. 어릴 때 숱하게 매 맞으며 궂은살이 박힌 머리지만 커서부턴 어느 누구도 나를 쥐어박을 사람이 없는데 어쩐 일일까. 날 때린 놈이 누군가해서 도끼눈을 뜨고 돌아봤다. 뒤편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고, 지나쳐 온 길에는 가지에서 늘어진 망고 열매가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건 망고가 나뭇가지를 철봉 삼아 매달렸거나, 열매에 실을 묶어 나뭇가지에 걸어두었다고 표현하는 게 옳다. 그러고 보니 내 정수리를 때렸던 범인은 망고 열매였던 거다. 한국을 대표해서 여길 온 내가 한갓 망고에게 꿀밤을 맞다니. 쿠바에서 당해보는 최초의 화려한 봉변이란 생각에 정수리를 만지작거리면서도 기가 차서 헛웃음을 흘렸다.

한국의 감처럼 망고는 쿠바에 흔한 유실수다. 다운타운만 벗어나면 덜 익은 열매가 떨어져 감또개처럼 발에 차이곤 한다. 호텔 뷔페나 레스토랑에서 먼저 찾는 음료도 당연히 망고주스다. 과일이 풍족한 나라지만 어떤 것도 망고 인기를 앞지르지 못한다. 어느 식당에 가더라도 망고나 망고주스는 내놓기 바쁘게 동나버린다. 트레이에 여러 가지 과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망고 놓였던 자리만 비어 있기 십상이다. 값싼 망고를 왜 다시 채워두지 않느냐고 툴툴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기도 한다. 4천 년 전 인도에서 재배되었다고 알려진 망고가 어떤 경로를 거쳐 쿠바까지 흘러들어온 건지는 알 수 없다. 신기한 것은 스페인어를 쓰는 쿠바나 인도나 영어권과 일본에서조차 망고라 부른다는 사실이다.

망고 앞에다 영어 O를 붙인 프랜차이즈가 있었다. 일본 사람이 섹슈얼리티를 동원해서 망고를 이윤 창출 수단으로 삼았다는 느낌이 팍, 온다. 오가던 일본인이 그걸 보고서 야릇한 미소를 지었을 게 틀림없다. 영혼까지 적셔 주는 신의 선물 망고에다 엉뚱한 이미지를 덧씌워 돈 벌 궁리를 하다니. 장사치들 머리는 일반인과 구조가 다른 것 같지만 쿠바에선 망고 따위로 돈 벌 궁리는 하지 않는 것 같다. 바나나처럼 말리거나 튀겨서 판다면 돈벌이가 짭짤할 텐데 어딜 가도 그게 보이지 않는다. 구황작물의 대표 격인 옥수수는 삶아서 케첩 묻혀 팔면서.

농사일 마치고 돌아와 먹었던 저녁. 기억을 되새겨보라는 듯 트레이 가득 망고가 쌓여 있다. 트랙터 타고 갈 때 머리 때린 복수를 하려는 듯 선 자리에서 큼지막하게 자른 과육 두 쪽을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이런 복수라면 끼니때마다 하더라도 재미가 쏠쏠하겠다. 하지만 망고 열매에게 당한 화려한 봉변을 어찌 잊을 수 있을지. 흔하지만 아무 때나 먹기 힘든 과일. 그럴 때마다 꿀밤 맞은 기억을 떠올려 갈증을 식히란 뜻일까. 머리의 혹은 곧 사라지겠지만 뇌 세포 속에 깊숙하게 새겨진 추억만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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