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왕’ 이성기씨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저는 평범한 청주시민 이성기라 합니다. 헌혈의 가치를 깨달아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359회의 헌혈을 했는데 올해는 주위에서 헌혈증을 달라는 사람이 없어 연말을 맞이해 이웃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몇 장의 헌혈증을 기증합니다. 부디 꼭 필요한 이웃에게 전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매년 겨울이면 반복되는 혈액부족 사태가 부디 올 겨울은 없기를 희망해 봅니다.”

<사진-지난 13일 동양일보에 44장의 헌혈증과 짧은 메모가 든 흰 봉투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이성기씨. 그가 두고간 봉투안에 들어있던 메모와 40여장의 헌혈증.>

지난 13일 한 40대 남성이 동양일보를 찾았다. 이 남성은 말 한마디 없이 하얀색 봉투만을 두고 떠났다. 봉투에는 이와 같은 내용의 짧은 메모와 44장의 헌혈증이 담겨 있었다.

헌혈증과 짧은 메모만을 남기고 홀연히 떠난 이는 이성기(42·사진·청주시 청원구 오창읍)씨. 이미 지역사회에서는 ‘헌혈 홍보대사’로 소문나 있다.

평소 헌혈증을 필요로 하는 지인들의 요청이 있으면 나눠주곤 했다는 이씨. 지난해와 올해에는 지인들의 연락이 없어 모아놓은 헌혈증을 동양일보에 전달한 것이다.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렇게 조명을 받게 돼 부끄럽습니다. 도움을 필요한 이웃들에게 잘 전달해주시길 바랍니다.”

그가 헌혈을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엔 헌혈을 하면 수업을 빠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생각 날 때면 한 번씩 하던 헌혈은 어느 날 낯선 이의 전화 한통을 받은 후 삶의 일부가 됐다.

“어느 날 전화 한통을 받았습니다. 전혀 모르는 분이었는데 ‘헌혈 증서를 기증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더군요. 학생의 몸으로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습니다. 이때부터 훨씬 더 적극적으로 헌혈에 나서게 됐습니다.”

해병대 복무 중에는 부대 여건상 헌혈차가 자주 오지 않자 휴가 때마다 인천혈액원을 찾았으며 2004년에는 충북지역 다회헌혈자들을 모아 ‘헌사모(헌혈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었다. 수혈자들에게 더 깨끗한 피를 주고 싶다는 생각에 즐기던 담배와 술도 끊었다. 지금은 시간이 있을 때 마다 전국 학교와 기업체를 돌아다니며 헌혈 강연을 펼친다.

“수혈·헌혈이라고 하면 모두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헌혈의 가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혈액난은 매년 반복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전국 곳곳을 찾아다니며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헌혈의 가치를 알려주기 위한 강연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의 총 헌혈량은 17만9500㎖ 정도. 1.5ℓ병으로 따지면 무려 120병 분량이다. 일생동안 1008회의 헌혈을 목표로 하는 그의 최종 꿈은 혈액자급자족이다.

“한국은 헌혈의 대부분을 10~20대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저출산 고령화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헌혈자는 점점 줄어드는데 수혈자는 계속 늘고 있죠. 앞으로는 한국에서 매년 반복되는 혈액난이 사라지고 일본 등과 같이 ‘헌혈 선진국’이 됐으면 합니다”

이제는 그를 따라 헌혈을 시작한 지인도 많아졌다.

헌혈에 동참하는 동료들을 볼 때마다 뿌듯하다는 그는 “헌혈은 건강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며 “많은 분들이 이 특권을 누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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