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유영선 상임이사) 연말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지나간 한 해를 떠올리며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와 가슴 따뜻한 일을 회상하며 새해를 예비했다. 그런데 올해는 가슴이 답답하고 서늘해서 아직 한 해를 보낼 준비를 못하고 있다. 제천 화재로 숨진 사람들 때문이다.
어제까지 살아있었고, 함께 웃었었고, 송년을 보낼 준비를 하던 우리의 이웃들. 그들의 죽음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이번 화재에 대해 너무 화가 나기 때문이다.
런던의 테스코라는 대형할인매장에 갔다가 놀란 일이 있다.
20세기에나 썼음직한 큼직한 구형 자물쇠와 열쇠, 우리가 어렸을 때나 보았던 작고 소소한 물건들이 한쪽 편에서 그대로 상품으로 진열돼 있었다. 계산대에도 사람이 없이 기계가 계산을 하는 첨단 매장에서 그러한 옛날 물건들이 여전히 상품으로 팔리고 있는 것을 보며 영국이라는 나라와 영국인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제천의 화재사고를 보며 문득 테스코 매장에서 본 열쇠들이 떠올려 진 것은 우리가 너무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어서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천화재의 인명사고는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사고였다.
유리를 통해 빤히 보이는 밖을 보면서 “나는 당신이 보이는데, 거리가 다 보이는데”라고 전화를 하면서도 유리문 안에 갇혀서 끝내 화마에 목숨을 잃는 이런 비극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닫힌 문을 열지 못해서 갇혀버린 원시적인 일은 바로 첨단기기에 당한 비극이다.
만일 사우나장의 문이 센서로 작동하는 자동문이 아니고 옛날 문처럼 열고 나갈 수 있는 문이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차근차근 대피하고도 남을 충분한 시간이었다. 첨단기기라고 하는 전자장치들이 화재에, 또는 전기에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우리는 간과하고 있다. 남자사우나탕은 유리문을 부수고라도 나올 수 있었지만, 여자 사우나탕에 있던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구르다 그대로 화를 당하고 말았다. 얼마나 몸이 달았을까.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했으니, 탕안엔 유리를 깰만한 도구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이번 화재 후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의 주변 환경이 어느새 모두 첨단 환경으로 바뀌어져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웬만한 아파트에 열쇠가 사라진지는 이미 오래 전. 귀찮게 열쇠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초인종을 누르지 않아도 입력된 번호만 누르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다는 편리함으로 이제 아파트는 물론 모든 사무실 출입문에 자동자물쇠가 붙어있다.
카페나 음식점 등 휴게공간들은 어떤가. 손님이 들어오면 스르륵 문이 열리고, 누룸키만 누르면 자동으로 문이 열린다. 이런 곳을 드나들 때 왠지 대접받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손의 수고로움을 덜게 해줘서일까.
엘리베이터에, 에스컬레이터에, 무빙워크에, 돈만 넣으면 물건들이 쏟아지는 각종 자판기에, 주위를 돌아보면 온통 편리한 물건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이런 일들은 이미 너무도 익숙해져서 일상이 되었다.
물론 이런 기기들의 고장으로 낭패를 겪는 일들도 제법 있다. 여행으로 집을 비운동안 배터리가 방전돼서 열리지 않는 자동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계단으로 오르내려야 하는 고층아파트, 전자장치 오류로 일어나는 자동차의 급발진. 컴퓨터 고장으로 하드디스크 안에 쌓여있던 모든 자료들이 사라져 버리는 사고. 그러나 이런 것들은 대처할 시간이 있기 때문에 넘어갈 수 있는 사고들이었다.
문제는 첨단기기가 사람의 생명과 관계될 때의 안전성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비상문 없이 자동문 하나로 드나들 수 있게 한 것은 애당초 설계의 잘못이지만 생각이 못미친 탓도 있다. 날로 진화하는 현대건물에 대한 세세한 문제점을 따라가지 못한 소방법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편리함에 길들어져 리스크를 간과하는 우리 사회의 안전불감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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