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영도는 1995년에 부산광역시 영도구가 되었고 지금은 인구가 16만 명을 육박한다. 동삼동 패총와 영선동 패총 같은 선사유적의 발자취를 거쳐, 삼국시대에는 거칠산국(居漆山國), 고려조에는 동래현, 조선조에는 동래부가 영도를 품었던 행정구역이다.
영도를 이야기 하려면 영도다리를 건너뛸 수가 없다. “……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 ”이 노래는 6·25 전쟁 당시 영도다리를 소재로 부른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이다. 금순이는 영도에서 태어난 실제 인물로 남항동 영도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했다는 이야기와 영선동에서 쌀가게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쩌든지 영선동 패총을 이룬 조개잡이 아지매의 생명력이 금순이로 현생한 것은 분명하다. 이는 곧 6.25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우리들의‘어머니’를  아우르는 이름이 아닐까싶다.
영도교는 1934년 11월 개통되어 1966년에 폐쇄되었다가 47년이 지난 2013년 11월 27일 재개통되었다. 길이 214m 인데, 590톤이나 되는 31m의 다리가 75도 각도로 10분 정도 열린다. 부산 시민들이 잠시나마 추억의 숲길을 걸어갈 수 있는 시간이다. 
영도 남동부의 태종대는 울창한 숲을 거느린 아름다운 해안으로 부산시민의 휴식공간이다. 특히 신선대는 기암괴석이 뭇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태종무열왕이 이곳에서 궁인들과 휴가를 즐겼다하여 태종대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현해탄을 무사히 건너 일본을 다녀온 사신들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이곳 절벽 위에는 모녀상이 있는 전망대가 있는데 날씨가 맑으면 대마도가 보인다. 밤이 되면 대마도에서는 높이 40m의 영도등대가 밤바다에 흩뿌리는 어머니 등불 같은 불빛을 바라볼 수 있다.
영도는 말 사육과 관련하여 목도(牧島)라 불렀다. 또한 이곳에서 기르는 말들이 어찌나 빠른지 말 그림자조차 볼 수 없다 하여 절영도(絶影島)라 하였다. 1881년에는 절영도진(絶影島鎭)이 설치된 기록도 있다.
이곳에 등대가 세워져 외로운 밤바다를 달래기 시작한 것은 1906년 12월이었는데 애초에는 목도등대라 부르다가 1948년 1월 4일부터 절영도등대라고 불렀다. 1951년 9월 1일 이곳에 출장소가 설치될 때, 절(絶)자를 빼고 영도(影島)라고 하였다. 세월 따라 밤바다에 불빛을 뿌리는 이 등대는 다시 영도등대가 되었다. 즉 ‘말 그림자 등대’가 된 것이다.
대마도는 절영도에서 50km가 채 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초지가 발달한 대마도는 자연스럽게 조선 제2의 말사육장으로 부상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대내전 노라가도로(盧羅加都老)는 대마도는 본래 조선목마지“朝鮮牧馬地”라고 하였고, 세종 29년 5월 25일 왕께서는“대마도 한 섬도 옛날 문적에 우리나라의 말 기르는 땅(我國牧馬之地)으로 실려 있고……….”라고 하였다.
고대 마한(馬韓)에서 부산 영도와 대마도에서 말을 기를 때, 영도 말 사육장과 구분해 그냥 대마(對馬)도라 하였으며, 부산에서 바라보면 윗대마와 아랫대마가 마치 말 두 마리가 서로 바라보고 있는 모양이므로 '두 섬'이라고 불렀는데, 일본인들도 ‘두’가 일본어로 ‘쓰’가 되므로 여기에 ‘시마(島)’ 합하며 쓰시마 (對馬島 つしま) 라고 부르게 되었다하기도 한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발끈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이렇게 확실한 대통령을 또다시 만날 수 없을까. 진정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국부(國父)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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