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한국폴리텍대 청주캠퍼스 학장

(이현수 한국폴리텍대 청주캠퍼스 학장) 속칭 문화계의 ‘구라’로 통하는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이 창비에서 발표된 것은 지난 2000년이다. 두 주인공인 오현우와 한윤희의 교차적인 이야기를 통해 암울했던 군사 독재의 정치적 폭력에 대응했던 고통의 세월을 황석영 특유의 우리식 문체로 담대하게 혹은 격정적으로 그려놓고 있다. 2007년 영화로도 만들어진 ‘오래된 정원’은 두 주인공이 6개월 동안의 시간을 함께 보냈던 갈뫼의 시골집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운동가의 유토피아적 이상향을 상징하기도 한다. 등장인물들의 내면에서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 노선과 방법 등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일상적으로 모나지 않게 서술하는 방식은 황석영의 순탄치 않았던 삶의 사색적 깊이에 바탕 한다. 혹자는 이를 두고 개량주의적이라고도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형화된 법도 개정을 전제로 입법화되는데 사상적 전술이 유연해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지 않은가. 움직인다는 의미의 운동은 언어의 경직성을 드러낼 때 유물이 된다. 대중을 권태롭게 한다. ‘오래된 정원’에서처럼 굳이 광주를 말하지 않아도 굳이 6월 항쟁을 현란하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 사려 깊은 시각으로 정의를 반듯하게 세우는 도덕적 실천은 깨어있는 시민이라면 누구에게나 열정으로 내재되어있기 때문이다. ‘열정을 해방하라. 굶주림은 참아도 권위와 권태는 못 참는다.’ 프랑스 68혁명 구호는 그랬다.

지난주에 개봉한 영화 ‘1987’은 고(故)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시작으로 6월 항쟁까지, 대한민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슬프고 뜨거웠던 1987년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담고 있다. 몇 일전, 해묵은 이사를 끝낸 저녁, 고단했지만 동네 영화관 구석진 자리에서 심야영화로 ‘1987’을 숨죽여 보았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가슴 먹먹했던 이유는 ‘1987년’은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가 오버랩 되는 날에 나도 서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나뿐이겠는가, 동시대를 살아낸 쉰 살 언저리 동년배들도 우리들의 연대기를 보며 울컥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엔딩 크레디트가 나오는 순간 무언가 공허함이 남았다. 영화 ‘1987’은 그해의 절반만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일컬어지는 그해의 하반기는 영화에 그려지지 않았고 그해 겨울을 서글프게 했던 참담한 대선 결과도 없었다. 그렇게 영화의 1987년은 1월부터 6월로만 국한되어있었다.

‘6월 항쟁’으로 얻어 낸 대통령 직선제는 당시로선 의미 있는 민주주의의 담대한 승리였다. 권력구조를 바꿔 낸 혁명적 시민운동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도약의 두 축을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이라 한다면 ‘6월 항쟁’의 기억은 전자가 후자를 압도한 시대적 경험이며 일 년 전 촛불의 자양분이었다. ‘1987’은 승리의 역사만 보여준다. 정치적 사실을 담은 영화는 서사적이며 정치적으로 해석된다. 부인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1987’ 그해에 누락된 역사의 그늘은 이렇다. “독재 타도 민주쟁취”의 거대한 외침은 그해 말 직선제 대통령선거운동으로 끝이 나 버렸다. 현실과 타협한 소위 ‘비판적 지지’는 야권 분열로 귀결되고 시민의 ‘1987’은 다시 군부 출신 여당 후보의 당선과 함께 그 막이 내렸다. 역사의 망연자실이었다. 고루하게 들리겠지만 감독의 늘어질 러닝타임 걱정과 더해질 제작비로 자위될 영화의 완성미가 아쉬운 대목이다. 제작진이 ‘그럼, 네가 한번 만들어봐’라고 힐책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본디 평가가 쉬운 법이거늘.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대한 보고를 통해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는 어떻게 자기중심성을 벗어나 타자 중심적 윤리로 악의 평범성이 돌아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렌트는 ‘우리의 기대와 달리 악은 평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엄혹했지만 격정적이었던 지난 80년대의 일들은 여전히 현재 지극히 평범하게 진행 중이다. 서늘한 시선으로 역사화하기엔 악의 평범성은 여전히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그 시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그분은 변형된 기억의 회고록을 통해 애달픈 광주의 기록까지 에둘러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런 시대를 우린 같이 살아가고 있다. 그것도 너무도 평안하게.

지금 우리는 그 30년 전의 역사를 ‘오래된 정원’과 ‘1987’을 통해 다시금 되새김질하고 있다.

‘오래된 정원’엔 “그때는 혼자만 행복하면 미안한 시대였어...” 란 구절이 나온다. 다시 2018년, 서슬 퍼런 군부가 떠난 자리에 적어도 800만에 달하는 비정규직과 졸업 후 일자리를 찾는 청년의 한숨이 남았다. 우린 이 시대를 정녕 미안해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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