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종인 당진문화원장

고등학교 학창시절에 만난 홍성찬 선생님은 나의 운명을 바꿔놓으신 은사님이다.

사제지간이지만 나이는 나보다 8년 연상의 선배동문이기도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50여 년이 지났어도 매주 목욕탕에서 조우遭遇하면서 여전히 인생의 멘토로 모시고 살고 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충남 당진의 시골마을이다. 초,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못하자 6.25때 할아버지와 사별하고 예산으로 개가하여 사시던 할머니의 호의로 그곳 예산농고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할머니의 보살핌도 잠시, 천안의 큰 아들집으로 이사를 가시면서 나는 기거할 곳이 없게 되었다. 방을 얻어 자취를 하면서 신문배달로 학비를 보태기도 하고, 산부인과 병원 집 아들의 가정교사 노릇도 해가면서 학업을 이어 나갔다.

3학년2학기는 취업준비가 우선이라서 교내 농산물가공실 장학생을 자청하여 일과 공부를 병행해야 했다. 때는 바야흐로 시험일자가 닥쳐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해서 돈을 벌어야 다섯 동생을 가르칠 수 있다는 장남으로서의 사명감으로 일찍이 농협중앙회 입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제도는 담임선생님의 추천서가 첨부되어야 응시원서를 제출할 수 있었는데 당시 담임선생님의 답변은 나를 천길 지옥으로 쳐 박는 것이었다.

“너는 1학기 수업료를 안내서 추천서를 써 줄 수 없다.”

수심에 차있는 나를 발견한 홍 선생님은 어떻게 아셨는지 그런 건 걱정하지 마라시며 열심히 시험 준비나 하라고 타이르셨다. 다음날 추천서를 해 오셨고 나는 무난히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전체 12명이 응시를 했었는데 유일하게 나만이 합격을 했고 전교생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졸업도하기 전에 취업한 농협은 나의 평생직장이 되어 40여년을 봉직했다.

만약 그 때 홍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평생을 고생스럽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당시 선생님은 대학을 나오시고 바로 교단에 서셨을 때이니 의협심도 강했던 분이셨다. 당시의 시대상황은 선생님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으셨을 텐데 선뜻 제자의 수업료를 내 주신걸 생각하면 보기 드문 사도師道의 모범을 보이신 스승이셨다.

첫 월급을 받아 우선 홍 선생님이 대납하신 수업료부터 갚고자했으나 받기를 끝내 거절하시므로 당시 제법 쓸 만한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선물로 대신하고 말았다. 내가 농협에서 바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홍 선생님도 고등학교가 대학으로 승격되자 교수로, 학장으로 승진하셨고, 한 때는 자치단체장에 출마를 하시는 등 활동의 폭을 넓혀 나가셨다. 이 때 얻은 데미지로 경제적, 정신적 손실이 상당하셨을 텐데 나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것이 아직껏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

홍 선생님은 학교를 정년퇴임하신 후 인근 농촌마을에 전원주택을 마련하시고 친구 또는 제자들을 불러 모아 체험으로 농사지어 나누어 먹는 일을 하고 계신다. 나 또한 농협을 정년퇴직하고 당진 고향에 들어와 이런 저런 농사일로 소일하면서 매주 덕산온천엘 간다. 선생님은 매주 일요일 목욕탕을 다녀서 아드님이 목회를 하고 있는 해미교회로 향하시고 나는 가족과 함께 그 시간에 맞춰 다녀오는 여정에 선생님의 안부를 여쭙는다.

때로는 농사에 관해서, 때로는 도서출판에 대해서, 건강에 대해서, 정치에 대해서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나누는 대화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언제나 싱그럽다. 사제 간이지만 남이 볼 때는 친구 같이, 형제같이 보일 법한데 나에게는 평생을 잊지 못할 은인이시다.

체구가 작으셔서 별명이 ‘개미선생님’이셨는데 제자 사랑하시는 마음이 바다와 같고 농업 농촌사랑이 태산과 같이 높으셨던 그 은사님! 사모님과 함께 일요일마다 교회로 향하시는 모습에서 부부지간, 부자지간의 애틋한 사랑을 훔쳐보고 있다.

“선생님은 하느님의 충직한 제자로 사시고 저는 선생님의 영원한 제자로 살렵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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