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우리나라 근현대교육의 역사에서 교육이란 객체가 국민들을 만족시켰던 적은 없는 듯하다. 이러한 일이 발생한 이유들 중 정부의 교육정책부재가 수위(首位)를 차지한다는 판단이 가장 큰 설득력을 유지하고 있다. 들어서는 정권마다 교육정책과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 낼 교육개혁에 대한 약속은 다채로웠으나, 그 실질은 형체를 이룰 것 같은 모습으로 피어올랐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봄날의 아지랑이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갑(甲)과 을(乙), 두 사람이 사과를 바구니에 담고 있다고 하자. 둘 다 3개의 사과를 담고 잠시 후에 4개를 더 담았다. 갑은 사과라는 과일과 그 사과를 담는다는 사실에 대해 감성적 느낌을 깊게 갖는 반면 을은 무엇을 담았는지는 모르나 3과 4를 더해서 모두 일곱 개를 담았다는 계산을 더 빨리 했다.

이 경우에 누가 수학을 더 잘하는 것일까? 우리의 현재 교육개념은 갑이 감성적 측면이 더 뛰어날 수 있으나 수학은 을이 더 잘한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자기가 무엇을 담았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 개수를 계산해야하는 일을 맡기는 것은 인격을 가진 인간과 연관시킬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인간을 기계로 파악할 때만 이런 일은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수학은 기술이 아니라 학문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클리드(Euclid of Alexandria)의 공리(公理)들은 수학을 이루는 기초가 아니라 허망한 상상에 불과하게 된다. 점(點)은 위치만 있고 크기를 가질 수 없는데 그것들이 모여서 어떻게 선(線)을 이룰 수 있는가? 기적을 통해 하나의 선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길이만 가질 수 있고 넓이는 가질 수 없는데 이들이 모여서 어떻게 2차원의 면(面)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또 한 번의 기적을 통해 2차원을 생성했다한들 넓이만 있고 높이는 없는 면들이 모여 어떻게 입체도형을 형성할 수 있을까? 점이 최소한의 크기를 갖는다면 그것은 이미 원(圓)이라는 도형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작은 도형이라도 이는 더 작은 단위로 자를 수 있으며 아무리 작은 숫자라도 그것을 반으로 자를 수 있는 가능성은 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수는 아무리 분해해도 더 작은 단위로 자를 수 있어야 하며 점은 면적을 가질 수 없어야 한다. 이러한 철학적 고민이 유클리드의 수와 도형에 존재론적 가치를 부여했다. 크기가 없는 것들이 모여서 어떻게 크기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논리적 의심을 바탕으로 탄생한 반대의 생각이 바로 원자론(原子論)이다.

수학에 있어서 형식적 문제풀이는 인간이 아닌 기계의 영역이다. 문제풀이 능력은 그 문제가 가진 철학적 측면을 필요조건으로 했을 때만 한 인간의 능력으로 해석될 가능성을 가진다.

그리고 교육은 기계가 아닌 인간에 적용되는 사건이다. 교육개혁과 교육정책에 대한 정권마다의 노력들이 성공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도출된다. 얼마나 빨리 세는가의 문제는 물질적이며 기능적인 존재방법을 추구하는 세상살이의 문제이다. 기계한테는 질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설정하고 다른 인간과의 경쟁을 통해 그들보다 나아지려고 하는 것은 기계보다 못한 존재들에게 던져 줄 일이다. 무엇을 세는가의 문제가 추상적 존재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자체의 문제이며 여기에서 도출된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기능적 측면의 연구가 빨리 셀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 왔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이며 학문의 발전이다. 그리고 그 사회적 베풀어짐이 바로 교육인 것이다. 사람의 존재를 하나의 국민이란 지위를 가진 물리적 생물체로 인식하는 순간 교육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현재 우리나라에서의 교육개혁은 잘못된 제도를 바꾸는 것이라는 개념에서 교육을 교육으로 인식하는 일로 전환되어야 한다. 교육을 본질 자체로 보고 이해하는 순간 이를 세상에 펼치는 방법은 너무나도 쉽게 도출된다.

그 쉬운 방법을 눈앞에 있어도 볼 수 없고, 들려주어도 듣지 못하며, 이미 손 안에 있어도 쥐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교육이 아닌 것을 교육으로 오인(誤認)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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