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정 원장

‘또 독감이군’
연신 가래 기침을 하며 힘든 표정으로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어르신을 보며 혼자서 생각한다. 독감의 계절이긴 하지만 광풍처럼 밀려오는 독감 환자분들 덕분에 정신이 없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독감을 설명하고 기계적으로 검사를 하고 형광펜을 그어가며 결과를 설명하곤 약을 처방한다. 워낙 많은 독감 환자분들을 접하다 보니 이젠 독감이 아니라 그냥 감기처럼 일상적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그 날도 그랬다. 아침 일찍 시할머니께서 아프시다며 연락이 왔다. 열도 많이 나고 기침도 심하시다며… 역시 독감이군. 열 빨리 가라앉도록 해열제 주사도 드리고 약도 드렸다. 고령이시긴 하지만 전에 급성 후두염에도 잘 회복이 되셨기에 이번 독감도 약 잘 드시고 회복되실꺼라고 믿으며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고열이던 열이 하루 만에 내리고 증세는 나아지고 있었다. 기력이 없으셔서 걱정이 되긴 했지만 잘 드시고 시간이 흐르면 회복하실꺼라 생각했다.
5일간 독감약을 다 드시고 난 후 할머니는 조금씩 기력을 찾고 계시다 하니 신나는 연휴를 보내고 월요일. 다시 ‘또 독감이군.’ 을 반복하던 중 접수대에서 계속 메시지를 보내왔다. 시할아버지께서 시할머니가 몸이 안 좋다고 연락 달라고 하신다며. 가끔 마음이 허하실 때마다, 정신 없는 월요일에도 늘 접수대에 전화를 걸어 얼른 집으로 오라고 떼를 쓰시던 터라 이번에도 그러려니 생각했다. 밀려드는 환자분들의 홍수 속에 간신히 시부모님께 연락만 드리고 정신없이 오전 진료를 마치곤 점심시간이 되서야 핸드폰을 들여다 보았다.  ‘뭐지?’ 시할머니께서 입원하셨다는 연락이다. 전에도 몸 아프시다고 입원하셨다가 하루 만에 퇴원하신 적이 있으셔서 이번에도 그런가 혼자 생각을 해본다.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고 한다. ‘왜지?’
남편과 함께 무슨 일일까 고민을 하면서 오후 진료를 시작했다. 저녁 어스름할 무렵 남편이 후다닥 나가는 모습이 복도 창 너머로 보인다. 남은 진료를 다른 원장님들과 다 마무리 하고 나서야 소식을 듣는다. 시할머니가 위독하시다고,
고삼투압성 고혈당 상태, 케토산 혈증, 폐부종. 오래 전 내과학 시간에 배웠던 용어들이 나오고, 집안 어른들의 극진한 기도에도 할머니는 몇 일간 회복이 되시는 듯하다가 결국 일어나질 못하셨다. 불과 3주 전에도 시할아버지 생신 때 같이 식사하시며 올해 구정은 어떻게 보낼지 집안 어르신들과 이야기 나누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독감의 광풍에 쓸려가듯 기력을 잃고 떠나버리셨다.
오늘도 진료하면서 독감 이야기를 반복했지만 더 이상 ‘ 또 ‘ 라는 지친 일상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