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공하는 영성의 ‘키워드’를 찾아가다 / 리징(李靜) 일본 교토대 대학원 박사과정

리징 교토대 대학원 박사과정

지난해 8월 저는 교토대학 오구라 연구실의 일원으로 한국에서 세 개의 포럼에 참가했습니다.

 

● 국제영성포럼-공공하는 영성

지난해 8월 4~6일 꽃동네대학교의 주최로 국제 영성(靈性) 포럼이 개최됐습니다. 일본과 한국에서 온 학자들은 ‘생명윤리의식’, ‘아라이 오오수이(新井奧邃)의 생명인식’, ‘유교적 영성’, ‘산 자(生者)와 죽은 자(死者)를 매개하는 힘으로서의 영성’, ‘안도 쇼에키(安藤昌益)의 직경(直耕) 개념의 재고(再考)’,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의 영성론과 그 현대적 의의’, ‘한국인의 영성’ 등 다방면에서 ‘영성’이라는 공통된 관심을 가지고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오구라 기조(小倉紀藏) 선생의 ‘제3의 생명론’도 혼과 영의 사이에 작용하는 영성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참으로 좋은 공부가 됐습니다.

 

1)“혼(魂)은 개개인에 내재하는 것(物)이지만, 영(靈)은 개개인과 개개인 사이에 일어나서 작동하는 일(事)이고, 거기서 생겨나는 영향력이나 변화력을 영성(靈性)이라고 본다.”는 것이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의 지론(持論)입니다. 저도 이 생각에 찬성합니다. 가령 비가 내린 뒤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나왔다고 하지요. 제가 문득 “아름다워.”라고 찬미할 경우에, 영성의 주체와 객체에 대해 어떻게 구별되는 걸까요? 저에게 영성이 있는 걸까요? 무지개에 영성이 있는 걸까요? 저와 무지개가 만나는 데 영성이 있는 걸까요? 꼼꼼히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문제가 되겠습니다. 그런 뜻에서 오구라 선생님이 말하는 ‘제3의 생명론’은 유력한 논설이 될 것입니다.

 

2)아라이 오오수이는 자타(自他)관계에 대해 ‘원립(遠立)’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즉 멀리서 상대를 지켜봄으로써 자타관계를 느슨하게 유지하면서 서로 깊이 연계하고 제휴하되, 서로의 독자성을 확보한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왕양명의 ‘만물일체(萬物一體)의 인(仁)’론과 상통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제 의견에 찬성하지 못할 분도 있겠지만, 제가 뜻하는 바는 이와 같은 비교연구를 바탕으로 해서, 각 종교사상의 공통선(共通善)을 찾아내고 종교와 국가 등의 ‘칸막이’를 뛰어넘고, 보다 나은 미래를 협동적으로 창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라는 것입니다.

 

3) 이번 발표를 듣고 ‘영성’이 ‘감성’과 ‘이성’보다 높은 차원에 놓여 있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과연 동일본대지진을 계기로 현대문명 자체에 대한 의문이 제시되었습니다. 현대문명을 기초케 한 데카르트는 ‘물질’의 본성을 ‘연장(延長)’에 두고, 그것에 대해 ‘사유’를 본성으로 삼는 ‘정신’과 대치시켰습니다. 이것에 의해 과학기술문명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만, 그 반면에 전근대에 있었던 인간과 자연과의 친밀한 연속성·동체성(同體性)을 가차 없이 분열시키고, 인간이 지배하면서 자연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결국 현재 이와 같은 문명이 세계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양을 비롯한 현대문명은 어떤 의미에서 앞길이 막힌 궁경에 빠졌기에 어떻게 해서 현대문명을 구해낼 수 있는 새로운 철학을 구축하고자 철학자들은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동양적인 가치와 세계관을 재평가함으로써 새로운 철학과 사상을 만들어내고 인류사회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학자는 적지 않습니다. 김태창 주간도 그러한 한 분입니다. 김 주간은 끈질기게 동아시아의 영성을 탐구하고 계십니다. 저는 그 노력에 감복하고 있습니다.

 

● ‘외천활리의 인문학’ 포럼

지난해 8월 10~12일에는 안동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서 이퇴계 사상에 관한 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됐습니다.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등지의 학자들이 ‘이퇴계에 있어서 리(理)와 하늘(天)’, ‘이발(理發):이퇴계 인성론의 근거’, ‘이도(理到):이퇴계 인식론 및 실천론(實踐論)’, ‘외천(畏天):이퇴계의 수양론과 영성론’ 등을 둘러싸고 아주 수준 높은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저에게도 좋은 체험이 됐습니다.

 

1)서양사상에서 지(知)를 가지고 경험세계를 인식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동양사상에서는 마음을 통해서 경험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렇다면 ‘리(理)’와 ‘지(知)’와 ‘마음[心]’의 관계를 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검토할 때에 종교성의 측면보다 영성의 측면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이퇴계의 ‘외천(畏天)의 리’의 측면에 대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해해 왔습니다. ─즉 이퇴계는 인간 이외의 자연계나 초월적인 ‘천리(天理)’에 대한 관심이 적고 인륜에 있어서 공부(工夫)에만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퇴계의 대표작인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중에서 ‘경(敬)’을 강조하는 한편, ‘천명(天命)’이나 ‘성(誠)’ 등에 관한 언설을 배제했다. 다시 말해 ‘지천명(知天命)’, ‘낙천지명(樂天知命)’과 같은 하늘에 관한 인식행위를 회피하고 내면적인 ‘지경(持敬)’만을 강조하고 있다. 퇴계는 리를 활동성=능동성을 가진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궁리의 대상을 ‘마음’이나 ‘사단(四端)’에 집중시켰다. ‘하늘’이 궁리의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하늘은 직접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두려워하고 공경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이와 같은 해석이 강한 영향을 미치고 학자는 오로지 마음에 내재되는 ‘하늘’의 해석=‘거경(居敬)’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유학사에는 ‘심학(心學)’ 중시의 경향이 보인다. 이렇게 해서 외재(外在)하고 초월적인 ‘하늘’은 이퇴계에 의해 봉인되었다. 그 후 서양사상의 영향을 받은 정다산(丁茶山)은 마음과 하늘과의 관계성을 회복했으며. 또 동학(東學)의 지도자는 ‘인내천(人乃天)’을 외치고 독창적인 ‘하늘’ 해석을 탄생시켰다.─ 이상에서 말한 것은 지금까지의 통설이지만 이번에는 성균관대학교의 어느 학자가 이퇴계의 리와 상제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논의를 주장하고 면밀하게 논했습니다. 즉 그 학자의 생각으로는 이퇴계는 잊어진 은(殷)나라 시대의 인격신을 다시 불러오고 ‘이법(理法)의 천(天)’보다 ‘인격의 천’에 무게를 두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이 논점을 기점으로 이퇴계의 사단론(四端論)과 이도설(理到說)을 다시 고찰하고자 시도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저는 크나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이퇴계와 주자를 비교연구를 통해 ‘귀신(鬼神)’과 ‘상제(上帝)’의 개념, ‘이법(理法)의 천’과 ‘인격의 천’에 대해 저는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한국 측의 학자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유교의 천 사상에 대해서는 고대중국의 상제보다 ‘하늘’ 관념에서 접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는 말이 들려옵니다. 이것은 앞으로 이퇴계 연구의 방향성에 관한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진지하게 논의를 심화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3) 이퇴계는 해동주자(海東朱子)로 존경받고 주자학을 조선에 보급한 인물입니다만, 이번 회의에 참가하고 학자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다음과 같이 느꼈습니다. 즉 현대 한국의 퇴계연구에 대해 ‘성리학’의 면을 해소하고 ‘심-천학(心-天學)’의 면을 강조하는 기미가 보였습니다. 어디까지나 저 개인의 이해이지만, 현재 한국에서는 퇴계학을 주자학에서 독립시키려는 경향이 보입니다. 이것은 아마 한국문화의 정체성과 관련되는 문제가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퇴계학과 양명학의 공통점도 그 자리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습니다. 그것은 시대의 흐름을 타서 새롭게 나타난 문화현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주지하다시피 퇴계는 양명학의 보급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퇴계의 학문은 ‘심학’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주장도 적지 않습니다. 앞으로 퇴계학과 양명학과의 관련성에 대해 객관적으로 또 냉정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 대해 한국의 어떤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조언해 주셨습니다. “‘심학’이라는 말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 두 가지 용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퇴계가 쓰는 심학은 넓은 의미로 성리학 전반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양명학을 가리키는 심학은 좁은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부언하면 원불교에서는 ‘마음공부’라는 한글 말을 쓰고 있는데 심학의 한글 표현인 것 같아요.”라고 지적해 주셨습니다. 제 문제의식에 관해서 해명하는 실마리는 아마도 “심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사상사적 측면에서 개념정리를 함으로써 얻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4) 회의 이외에 우리는 퇴계 종택을 방문하고 퇴계의 성묘까지도 해서 퇴계의 정신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특히 모두 함께 퇴계가 강학하던 도산서원을 견학한 것은 인상에 남아 있습니다. 긴 시간 퇴계와 유교의 관계에 대해 활발하게 논의했는데 도산서원에 가보면서 자연스럽게 퇴계와 도교의 관계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부언하면 도산서원의 ‘도(陶)’는 도교의 인물인 도연명(陶淵明)이나 도홍경(陶弘景)과도 인연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퇴계와 도교와의 관계에 대해 더 깊이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와 미래공창

8월 13~15일에 청주에서는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와 미래공창-조명희·나쓰메소세키·루쉰의 비교 조명’이라는 국제포럼이 개최되었습니다. 중국, 일본, 한국, 러시아에서 온 학자들이 ‘영혼의 탈식민지화’라는 주제로, 영(靈), 혼(魂), 영혼(靈魂)에 관해서, 조명희, 나쓰메 소세키, 루쉰을 비교 조명하는 가운데서 살펴보았습니다.

 

1) 육체와 혼의 관계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루쉰은 처음 의학을 공부했지만 나중에 의학은 사람들의 몸을 치료할 수는 있어도 그 혼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의학공부를 그만두고 문학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우 과연 몸과 혼은 대립관계에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육체의 억압과 영혼의 억압은 같은 것이지요. 예를 들면 중국에서 명청(明淸) 교체시절에 청나라에 대한 항거로 머리 깎기를 거부한 일에도 영혼의 항쟁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한국의 시인 조명희의 기구한 운명에서도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볼 수 있습니다.

 

2) 후카오 선생님은 혼이 식민지화된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했습니다. “사람의 혼이 누군가에게 주박(呪縛)되어 그 온전한 자아가 손상되어 있을 때, 그 혼은 식민지상태에 있다고 정의된다.” 루쉰은 ‘입인(立人)’을 중시했습니다. 사람의 사람됨을 올바로 세워야 된다는 것이지요. 혼이 식민지화되어 있으면 입인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저는 유교의 입장에서 ??논어??의 한 구절에 “내가 일어서고 싶다면 남을 일어서게 해주고, 내가 이루고 싶으면 남이 이루게 하는 것이다.”(己欲立 而立人, 己欲達而達人)라고 하듯이 자타관계를 상극(相克)이 아니라 상생(相生)으로 보고 있고, 보다 밝은 미래를 바라고 있습니다.

 

3) 루쉰과 전통문화의 관계에 대해 많은 한국 학자들은 루쉰과 전통문화와의 단절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루쉰에는 독특한 사고방식이 있어서 2원 대립적인 면에서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루쉰은 완전히 전통문화를 부정하지도 않았고, 무분별하게 서양 근대문화를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루쉰의 사상에 유교·도교·불교의 영향도 들어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루쉰은 ‘선비[士]’의 전통을 굳게 지켰으며, 그의 삶은 맹자의 이른바 “비록 천만의 적이 있어도 나는 갈 것이다”(雖千萬人吾往矣)라는 사풍(士風)을 구현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루쉰의 작품 ‘고향(故鄕)’, ‘백초원(百草園)에서 삼미서옥(三味書屋)까지’ 등은 언제나 어린이의 눈으로 주위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노자가 찬송하는 아기의 무심함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루쉰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리더인 혜강(?康)의 작품을 애독했으며, 아홉 차례에 걸쳐 혜강문집을 교정하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루쉰은 혜강의 반항정신에게 공명함과 동시에 장자에 대한 친근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또 루쉰이 약자를 가엽게 여기는 데에도 불교의 자비와 공통되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루쉰과 삼교(三敎:유교, 불교, 신도)의 관계는 앞으로의 과제로 검토하고 싶습니다. 지금 중·일·한 세 나라는 서로 긴장상태를 지속하면서 더욱 대립관계를 강화시키고, 상호 오해의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개선하려면 지혜와 대화로써 문제와 맞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면에서 말하면 김 주간의 노력으로 이러한 ‘교류의 자리’가 마련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진지하게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 나라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냉정하게 들을 수 있다면, 앞으로 훌륭한 만남이 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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