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본래 ‘교육’의 개념이나 이를 위한 정책이나 제도 등은 옳고 그름의 잣대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만일 그것들이 실질적 존재가치를 가진다면... 그러나 사회구성원이 동의하지 않는 교육제도는 현실적으로는 늘 ‘옳지 않다’는 평가에 시달린다. 인간과 그 사회는 자신들의 정체성으로부터 먼 개념들에 대해 감정적 판단을 내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민족’, ‘국가’, ‘교육’같은 구성원의 공통성을 강조하는 용어일수록 이론보다는 감성에 그 근거를 둔다. 이러한 용어에 논리의 틀을 부여하려는 노력은 주관적 경험론의 힘을 빌리든지 방법론적 회의(懷疑)에 온전히 그 이름을 걸치지 않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교육개념과 교육제도는 기존의 형태에 고전주의적 가치를 부여해 놓고 이를 사실주의적 감성으로 접근하는 비논리를 근거로 만들어진다. 주정주의(主情主義)와 주지주의(主知主義)의 장점들을 열거해 놓고 상황에 따라 적당한 것을 뽑아내어 거기에 정당성을 부과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가치를 가지지 못하나 형식적으로는 가치를 가지는 방법이 여기에서 탄생된다. 그것이 교육개혁의 근본적 오류와 장애를 생산해 낸다. 현재의 학교와 교육시스템으로는 교육개념의 근처에도 얼씬거릴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교사만이 주연배우로 무대에 올라서는 학과수업, 물리적 생존기간을 기준으로 구성되는 학년, 객관적 숫자를 바탕으로 학생의 머릿수를 세어서 구성하는 반(班), 온전히 겉모습만으로 구분되어 있는 학과목, 기계적으로 표준화되어 있는 학과진도시스템, 오직 대학진학(進學)기관으로써만 그 존재가치가 인정되는 대다수의 청소년 교육기관들, 이 유무형의 시스템 자체가 교육개혁의 대상일 때 우리나라의 교육개혁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존재가치와 방법에 대해 의문의 대상이 되지 않는 그래서 개념적 성역화가 완료된 이들에 대해 우리나라의 그 누가 감히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가? 감성적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해석된 그 정체성이 아무리 허구에 뿌리를 틀고 있다 하더라도 대다수 국민의 의식 속에서 교육의 뼈대로 인식되고 있는 개념이라면 이는 개혁해야 하는 대상에 속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교육개혁은 이 부분들에 칼을 댈 수 있어야만 그 효과가 부정적이지 않을 가능성을 가진다. 지금의 교육개념들은 청소년들을 키우는데 조력하는 제도를 창출할 수 없다. 청소년들로부터 ‘문제아’들을 양산해 내고, ‘공부를 싫어하는 경향’을 만연(蔓延)시키고, 안정적 직장이 인생의 최대의 희망인 ‘꿈이 없는 청소년’들을 양산하며, 삶의 철학을 세우는 일보다 인터넷 게임이 더욱 소중한 ‘가치를 잃은 세대’를 창출한다. 이 개념들은 지금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만들지 않았다. 어른들이 삶의 본질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객관적 형태요소들에만 집중하여 조작해 놓은 형상들이다. 그리고 어른들이 만든 이 개념들을 후손들이 지키기를 원함으로써 형태적으로 완성된 체계이다. 어른들은 지금 이 본질적 허구로부터 삶의 가치를 캐내어 우리의 후손에게 내어 놓음으로써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현재 우리가 논해야할 교육개혁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현재 지독한 불신에 시달리고 있다. 학습제도는 형식에서 시작해서 형식으로 끝을 맺어야 하도록 되어 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한 모든 시스템은 오직 형식에 그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주관식 시험마저도 객관화시킴으로써 성적을 평가하는 교사를 믿지 않아야 할수록 좋은 성적평가시스템이 된다. 학생의 인격과 미래의 성장가능성은 너무나 주관적이어서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일수록 분명한 지지를 받는다. 그래서 사회를 이끌어 가는 동력을 가진 청소년들을 배척하고 현재의 제도에 순응하는 것으로 청소년의 됨됨이를 평가한다.

현재는 이미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이다. 불과 2-30년 후에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삶에서 가치를 배격하는 것이 교육의 가치로 인식하는 지금의 교육제도는 얼마 후 쓸쓸한 뒤안길에서 후손들이 겪는 가치의 혼동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는 교육개혁을 본질적 측면에서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만이 역사의 추궁으로부터 우리 세대가 조금이라도 비켜설 수 있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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