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충북단재교육연수원장

영화 ‘1987’ 관객 수가 600만명을 넘었다.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서울대 박종철 학생 고문살인으로 시작된 그 해 1987년은 차갑고도 뜨거웠다. 한 해 전인 1986년 서울대 여학생을 붙잡아가서 성고문이란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독재정권의 권력남용은 국민들의 가슴을 뒤집고 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했으나, 추운 겨울은 봄을 예고했다.

민주화는 거리뿐 아니라 나라 곳곳에서 진행됐다. 노동자들은 단결권을 확보했으며, 교사들은 어떻게 하면 경쟁에 찌든 학교를 아이들이 다닐만한 곳으로 바꿀지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고 공부했다.

민족 기상을 잃어버린 아이들을 위해 교사들은 장구며 북을 배우러 다녔고, 학교에는 풍물반이 생겨났다. 과학교사들은 신나는 과학을 위해 방학 때마다 자비로 외국을 오가며 공부했고, 그 성과는 교실에서 바로 나타났다. TV는 그 선생님들과 함께 아이들에게 ‘호기심 천국’을 보여주었다.

국어교사들은 국적 없는 신호전달기능만 남은 언어교육에 민족과 공동체와 성찰 등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교사들은 아이들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국어교사모임을 만들었고, 역사, 수학, 음악, 미술 등 교과별로 만나고, 지역을 넘어 전국을 넘나들었다.

학생, 학부모와 교사의 관계를 깨는 촌지거부 운동에 강남 8학군 지역 교사들이 앞장섰다. 이들은 등록금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 제자들을 위해 기꺼이 박봉을 털었던 선배교사들의 고운 성정을 이어받았다. 나는 아이들을 위해 열정적인 그들을 보며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

그 해 나는 늦깎이 초임 2년차 신규교사였다. 나는 교직생활에서 1987년 그 해를 잊을 수 없다. 서울 강남 8학군의 남자 중학교에서 2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는데, 내가 근무한 학교는 한 학년이 18개 학급이나 되었고, 한 반 학생수가 50명을 넘나드는 대규모 학교였다.

당시 학교에서는 2학년 전체 10명의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있었는데,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관리하는데 힘이 들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10개 반에 한 명씩 흩어 넣고 관리를 하게 하였다. 그렇게 되면 한 학급 한명인 특수학생들은 그야말로 특수한 학생이 되었다. 소외문제가 발생하기 일쑤였다. 또래인 특수교사는 일반 아이들과 장애학생들과의 통합학급이 모두에게 교육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 해 우리는 각 학급으로 한명씩 흩어질 예정이었던 10명의 정신지체 장애학생들을 모두 한 반에 몰아넣어 달라고 교장선생님을 설득해서 승낙을 얻어냈다. 나와 특수교사가 함께 담임-부담임을 맡았다. 강한 신념과 확신, 용기가 있었지만 걱정이 앞섰다. 3월초에 학부모들을 모아 장애를 가진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아이들의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을 설명하고 설득했다. 학부모들이 따뜻하게 수용해주었다.

결과는? 최고였다. 아주 섬세한 성격이었던 특수교사는 덤벙거리는 나의 담임소임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었고, 나는 아이들과 공을 차거나, 체험활동을 하는 등 그 분이 잘하지 못하는 것을 했다. 우리 반 아이들은 힘든 친구들을 챙겨주며 성큼 건강한 청소년이 되어갔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생기는 말할 수 없는 자부심이 아이들에게 생겨났다.

지적장애를 가진 특수학급 아이들은 즐겁게 친구를 사귀고 도움을 받았다. 심지어는 특수아 10명이 함께 있는 우리 반이 학년에서 성적꼴찌가 아니었다. 보살핌과 협력과 존중이 아이를 성장시켰고, 자부심을 선물로 주었다. 작년, 30년 만에 그 아이들이 괜찮은 어른이 되어 나를 찾아왔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는 고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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