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1586년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부하 야스히로가 조선정부에 사신으로 왔다. 그의 무례한 행동은 참아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천하는 짐의 손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의 국서를 손에 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정부는 통신사를 파견해 달라는 도요토미의 요청을 무시하고 "바닷길이 험하니 사신을 보낼 수 없다"는 답서를 일본 사신에게 쥐어 주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도요토미는 성과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온 사신과 그의 일족을 몰살 시켜버렸다.

대마도 도주는 조선과 일본의 중간에서 양국의 눈치를 보며 살아남기 위해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조선의 세사미로 살아가며 벼슬을 받고 있었지만 도요토미가 막강한 무력을 앞세워 일본을 통일하자 요시토시는 구마모토(熊本)로 찾아가 도요토미의 심복이 되겠다고 굴신한 상태였다.

이번에는 소 요시토시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가짜 승려 겐소(玄蘇) 대동하고 도요토미에게 달려가 조선과 교섭하겠다고 자청하였다.

그래서 1588년 10월과 다음해 6월 조선정부에 들어와 통신사를 보내라고 다시 요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겐소 일행은 몽고군의 일본정벌 당시 고려가 몽고군에 가담했던 일을 상기시키며 “일본이 고려에 대한 원한을 갚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은근히 위협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이들은 1590년 3월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공작새 2마리와 조총을 광해군과 유성룡을 통해 선조에게 바쳤다. 선조는 공작새는 날려 보내고, 조총은 군기시(軍器侍)에 넘겼으나 아무도 조총에 대하여 경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일전 유성룡이 신립에게 "조만간 국가에 큰 변란이 있을 것 같소. 더구나 그들은 조총이라는 신식 무기까지 갖추고 있다하오.”하자. "그 까짓 것 걱정할 것 없소이다. 왜놈들이 갖고 있다는 조총이 쏠 때마다 맞는 건 아니니까요“라고 말했다.

1590년 3월 6일 조선정부는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을 비롯하여 약 200여명의 일본 정탐을 위한 통신사를 꾸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김성일은 사사건건 예절에 어긋난다고 따지고 들었다. 대마도주는 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가짜 승려 겐소는 김성일의 비위를 맞추며 도요토미의 의중을 전달하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대마도 서산사에 가면 이들이 주고받은 시들이 비석에 담겨져 있다.

통신사 일행은 1591년 1월 28일에 귀국하여 3월에 선조 앞에서 일본의 조선 침략 가능성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서인 황윤길이 일본의 침입을 주장하자 동인의 김성일은 그렇지 않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정말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겠는가. 이때 동인 허성은 오히려 서인 황윤길의 의견이 맞다고 동조한다. 불행한 역사 속에서도 참다운 선비를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해 4월 겐소 일행은 다시 들어와 1년 후에 "명에 쳐들어갈 길을 빌리겠다."라고 하자, 조선 정부는 명나라에 이 사실을 알리고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고 성을 쌓도록 하였는데 김성일은‘축성을 금지하라’는 상소를 올린다. 정말 미친 존재감이었다.

각 도에서는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일어나지 않을 왜란에 대비하느라고 민폐를 야기한다는 원성이 제기되었다.

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1592년 부하 구키 요시타카(九鬼喜隆)를 시켜 대마도가 포함된‘조선팔도총도’를 그리게 하고 ‘공격대상’이라고 적어 넣게 한다.

그리고 4월 조선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때 일본의 총병력은 약 20여 만 명이나 되었다.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5월 2일 서울을 함락해 버렸다.

겐소의 바랭이 걸방에는 조선의 지형을 몰래 그린 지도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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