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포석 조명희(1894∼1938)는 한국 최초의 창작 희곡 ‘김영일의 사’를 썼고, 그 희곡으로 한국 최초의 순회공연을 벌였으며, 한국 최초의 창작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펴낸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다.
일제강점기 1928년 8월 21일 소련으로 망명해 새로운 문학과 삶을 개척해 나간 포석은 문학과 교육을 통해 민족 계몽의 선봉에 섰으나 1938년 일제 스파이로 누명을 쓴 채 총살형을 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포석의 타계 80주년을 맞아 러시아에 남아 있는 그의 자취를 살펴본다. <편집자>
 
“낙동강 칠백 니, 길이길이 흘으는 물은, 이곳에 이르러 겻가지 강물을 한몸에 뭉처서 바다로 향하야 나간다. 강을 따러 바둑판 갓은 들이 바다를 한하야 아마득하게 열녀 잇고, 그 넓은 들 품 안에는 무덤무덤의 마을이 여긔저긔 안겨 잇다. 이 강과 이 들과 거긔에 사는 인간-강은 길이길이 흘넛으며, 인간도 길이길이 살어왓섯다. 이 강과 이 인간! 지금 그는 서로 영원히 떨어지지 안으면 안이 될 것인가?”(소설 ‘낙동강’의 첫 대목)
포석조명희가 1927년 7월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발표한 단편소설 ‘낙동강’은 그의 대표작이자 프롤레타리아문학(프로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서정적이면서도 계급의식이 뚜렷한 이 작품은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와 민족주의 계열 작가들이 치열한 논전을 벌이고 있을 당시 좌우 양쪽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낙동강 어부의 아들로 자란 주인공 박성운이 일제의 갈대밭 강탈로 삶의 터전을 위협받자 투쟁에 나선다는 것이 기둥줄거리다.
1923년 창작 희곡집 ‘김영일의 사(死)’와 1924년 창작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펴낸 근대문학의 선구자 조명희는 디아스포라 문학의 개척자이자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1928년 소련으로 건너가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하바롭스크 등지에서 잡지를 발간하고 교편을 잡으며 항일의식을 일깨우고 인재를 길러내는 한편 산문시 ‘짓밟힌 고려’, 장편소설 ‘붉은 깃발 아래서’와 ‘만주 빨치산’ 등을 집필했다. 그가 직접 가르쳤거나 영향을 끼친 강태수·리시연·문금동·최영근·김부르크 등이 고려인 문학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냈고, 현경준이나 김학철 등 조선족 작가들도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1937년 스탈린 정권이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킬 때 사전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지도자급 인사 2500여명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조명희도 9월 18일 일제 간첩 혐의를 쓰고 투옥돼 이듬해 5월 11일 총살됐다. 스탈린 사후 1956년 복권돼 누명을 벗었고 1958년 소련과학원이 ‘조명희 선집’을 출간했다.
지난해 9월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동포 간담회에 참석했다가 한 동포의 권유를 받고 일정에 없던 조명희 문학기념비를 찾았다. 악사콥스카야 12A번지 공원에 2006년 건립된 이 비석 앞면에는 ‘포석 조명희 문학비’라고 음각해놓았다. 뒷면에는 포석의 시 ‘아무르를 보고서’의 한 구절과 연보를 새긴 동판이 붙어 있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나보이문학박물관에도 그의 딸 조발렌티나가 주도해 1988년 조명희 기념실을 꾸며놨다. 오른쪽에는 육필 원고와 편지, 작품집, 신문기사, 가족사진 등이 전시돼 있고 방명록에는 답사객들이 남긴 글이 적혀 있다. 맨 가운데 흉상을 세워놓았고 뒤편에는 “그러나 필경에는 그도 멀지 않아서 잊지 못할 이 땅으로 돌아올 날이 있겠지-락동강”이라고 적은 편액이 걸려 있다. 그러나 편액 문구와 달리 조명희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조명희의 출생지인 진천에는 2015년 포석 조명희 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진천군이 약 30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건립했고 러시아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조명희의 차남 조블라디미르가 20만 달러(약 2억1300만원)를 기부했다. 지하 1층, 지상 3층에 연면적 970㎡(약 300평) 규모의 이 문학관은 전시실을 비롯해 문학 사랑방, 창작 사랑방, 문학연구실, 수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동양일보와 진천군은 1994년부터 매년 10월 포석 조명희 문학제도 열어 그의 항일 정신과 문학 세계를 기리고 있다.
올해는 조명희 타계 80주년이다. 블라디보스토크, 타슈켄트, 진천 등과 달리 조명희가 마지막 2년간 살다가 숨진 이곳에는 그를 기억할 만한 유적이나 기념물이 없는 형편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콤소몰스카야 89번지에는 조명희가 살던 집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철거됐고 새 건물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그나마 희미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카를 마르크스 거리의 시립공동묘지다. 이곳에는 1930년대 스탈린에 의해 처형된 사람들이 묻혔는데 조명희의 무덤은 찾을 수 없다. 입구에 정교회 성당 모양의 기도실이 있고 바로 옆에 희생자들을 기리는 검은색 기념비 한 쌍이 서 있다. 빗돌 네 면에 러시아어로 빼곡히 적힌 4300여 명의 명단 가운데 조명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묘역 정면에는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추모비도 있다.
하바롭스크에서 말년을 보낸 조명희는 아무르강을 볼 때마다 조국의 산하를 적시며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을 떠올렸을 것이다. 80년이 지난 지금쯤은 아무르강을 따라 바다에 닿은 그의 애국혼이 동해를 거쳐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고향에 도착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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