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선

나는 6.25(한국전쟁)가 휴전으로 끝난 지 10여년이 되던 해에 부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고향은 강원도 강릉 이였고 어머니의 고향은 대전 이였다.

그 먼 곳에 계신 분들이 나를 부산이란 낯선 곳에서 태어나게 하셨다.

자라면서 본 것은 아버지의 술 취함과 고성, 폭력, 그 앞에 숨죽이며 자녀들을 돌보시는 어머니의 측은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미웠다.

그 후 세월은 유수와 같아 아버지와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오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 덩그러니 세상에 남겨져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어머니에게 불효한 심정만 남았다.

아버지는 왜 술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소리 지르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왜 그렇게 술 만 드시면 고성을 지르고 세상에 화를 내셨을까.

아버지께서는 한국전쟁에 참전해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북한군과 싸워 혁혁한 공을 세우셨다.

하지만 그에 따른 정신적 충격과 후유증으로 많은 세월을 고통 속에 머물다 세상을 마감하셨다. 참으로 안타까운 생애였다.

전쟁은 승자에게나 패자에게나 정신적 충격을 주었을 것이고, 전쟁 트라우마로 고통 받는 아버지를 치유할 수 있는 그 어떠한 의료, 상담조치도 취할 수 없었던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 술과 고성은 자신을 추스르는 또 하나의 치유책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07년이 되어서야 아버지는 국가유공자로서 무공수훈자로 예우를 받게 되었다.

고인이 된 상황에서야 아버지는 술병을 놓으시고 조용히 말씀하시는 듯하다.

“아들아, 여기가 우리가 목숨 바쳐 싸우고 전쟁에서 이겨 지켜낸 대한민국이란다.”

나는 다음세대를 위한 교육자이며, 시대의 암울함을 들춰 예수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성직자로 살아가고 있다.

나의 아버지께서 목숨 바쳐 지켜낸 대한민국의 자유.

나는 늘 이 자유대한민국을 어떻게 지켜 내어 다음세대에게 물려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나도 아버지처럼 어느 한 곳에서라도 목숨 바쳐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켜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총, 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 자유 민주주의가 가져다 준 번영을 제대로 학습시켜 주는 것일 것이다.

이 겨울 깊은 밤, 아버지의 술주정까지가 그리운 것을 보니 나도 나이가 들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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