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영 서원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정민영 서원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툇마루는 집의 안채나 바깥채의 가장자리나 밖으로 달아낸 마루다. 본래 칸살의 밖으로 붙여서 만들었기 때문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마루로 일종의 덤인 셈이다. 그러나 툇마루는 오래 전부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아주 요긴하게 쓰여 오고 있다. 전통 가옥의 구조상 집을 안팎으로 드나드는 통로이고,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첫발을 내딛는 곳이다. 때로는 집 안의 사소한 허드렛일을 번거로움 없이 곧바로 처리해 버리는 효율적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툇마루는 누구에게나 늘 열려 있는 곳이니 안팎이 따로 있을 수도 없고, 주인이 따로 없으니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이다. 집의 바깥채에 딸려 있는 경우라면 더욱 자유로운 곳이다. 언뜻 보면 보잘것없이 허름한 곳 같지만 우리는 툇마루에서 많은 것을 얻고 산다. 툇마루는 집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시켜 주는 완충 공간이다. 이곳으로 드나들며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하고 갑작스런 분위기 변화에 적응하며 마음을 가다듬기도 한다. 또한, 툇마루는 흙발을 털지도 않은 채 아무렇지도 않게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면서 사색에 잠길 수 있는 곳이다. 때로는 여유롭게 앉아서 굽이진 산등성이와 하늘 저편으로 옛일을 떠올리며 우주의 신비를 만나고 무심(無心)과 지족(知足)을 맛보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나의 고향 집 바깥채에도 아주 작은 툇마루가 딸려 있다. 그래서 가끔 고향을 찾아갈 때면 사람들 틈에서 슬며시 빠져나와 혼자서 툇마루에 앉아 옛일을 회상하곤 한다. 이 툇마루는 나의 유년 시절에 지어진 행랑채의 바깥쪽으로 내어 만든 작은 마루다. 처음부터 보잘것없이 만들어진 데에다가 반세기 넘도록 풍우설한을 견디어 왔으니 지금은 퇴락할 대로 퇴락해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선친께서는 툇마루 위의 행랑채 벽에다 혁필로 백인당(百忍堂)이라는 이름을 써 넣으셨다. 지금은 거의 지워져 버렸지만, 마음 심(心)의 한 획이 남아서 희미하게나마 옛날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어쩌면 그 한 획이 끝까지 참고 견디는 것은 결국 마음의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부질없이 해 보기도 한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마을 어른들로부터 우리 가문의 파조(派祖) 어른께서 정승을 여섯 번이나 지냈다는 전설적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뜻도 모르면서 그분의 중화(中和) 사상과 그에 얽힌 일화(逸話)를 수없이 들어야 했다. 그때 나는 중화의 의미를, 매사에 나서지 말고 싸움에 지는 게 이기는 방법이라고 어렴풋이 이해하였다.

우리는 하루하루 쫓기듯 바쁘게 살면서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산다. 그런 우리에게 툇마루는 삶의 지혜를 제공해 주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퇴(退)’의 의미를 조금씩 깨닫게 해 준다. 중심으로부터 한발 물러서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게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가르쳐 준다. 이처럼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은근하게 암시해 주는 곳이 툇마루다. 그뿐 아니라 고향 집의 툇마루는 어린 시절 엄마의 품처럼 한없는 사랑으로 지친 삶을 위로해 주기도 한다.

힘겹고 외로울 때 부담 없이 찾아가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고향 집 툇마루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전에 미리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되고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고 언제나 가슴속에 사무치는 그리움을 안고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고향 집 툇마루는 격식 없이 앉아서 가슴 가득 안고 간 고민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가볍게 일어서서 떠나 올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이 무분별한 도시화와 산업화가 비껴간 한적한 시골 마을이라면 더욱 정겹고 아름답다. 잊고 지내던 희미한 기억 속의 옛일들을 은밀히 끄집어내어 음미하며, 탁 트인 공간으로 쏟아지는 햇살과 자유로이 드나드는 바람을 그저 바라보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따뜻하고 편안하다.

살아오면서 옛날의 순수함을 하나 둘씩 잃어 왔지만, 나는 청아한 고향 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생각의 씨앗을 싹틔울 수 있었던 행운을 지금까지도 누리고 산다. 동골동 골짜기 위로 아침 해가 떠오를 때면 우리 조무래기들은 바깥마당에 나와 서서 기지개를 켰다. 엄마가 몽당비로 깨끗하게 쓸어 놓은 봉당과 안마당 위로 밝은 달빛이 스르르 내려앉는 밤이 되면 이 툇마루에 나와 앉아서 앞산 나뭇가지 위로 쏟아지는 별빛을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었다. 그땐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없었고, 전기와 수도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들이 무조건 떼쓰고 매달릴 수 있는 ‘울엄마’들이 곁에 있어서 매우 든든했었다.

거칠고 야박한 인생의 격랑을 뒤로 하고 다시 또 어린 시절의 툇마루를 찾는다. 오랫동안 고향의 땅을 지키고 살던 사람들이 지금은 참 많이도 고향을 떠나갔다. 돌이켜 보면, 어두운 시대와 가파른 인생사를 모두 견뎌 내고 끈질긴 삶을 살아 온 그들의 발자취에서 질박한 향기가 난다. 애잔한 바람결에 실려 지나가는, 고단했던 삶의 흔적들 곁에서 숙연한 마음으로 툇마루에 앉아 또다시 밤하늘을 우러른다. 별빛도 달빛도 옛날의 신비로움보다는 오히려 쓸쓸함으로 다가와 나는 무량한 그리움에 젖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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