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 폭발사건 이후 문화통치 민중보급 필요성 대두”

● 신정의 취지와 민중의 이해

▷야마가미 “모리야씨가 앞에서 총독·정무총감 양 각하가 부임할 때까지, 즉 남대문 폭탄소동사건(강우규 의거)까지의 경과를 자세히 설명해 주셨는데 그 이후, 즉 착임 이후의 시설상의 제반 계획에 대해 계속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모리야 “앞에서 총독·정무총감 부임 때 돌발했던 남대문 폭발사건 부분까지 말씀드렸으므로 계속해서 그 후 실행에 들어갔던 시정상의 중요한 사건들을 몇 가지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부임 당시 남대문 역 앞에서 폭탄이 파열했던 사건에서도 상상할 수 있듯이 그 당시 조선의 형세는 매우 불온한 것이었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총독·정무총감 암살 음모가 있다든가, 경찰국장의 목에 상금이 걸려 있다든가, 상해임시정부의 사주(使嗾)를 받아 각지에서 소요를 계획하고 있다든가 하는 등 각양각색의 불온한 정보가 수시로 들어왔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 민중은 앞으로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르는 불안과 걱정에 몰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 부임 후의 사정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치안유지를 위해 전력을 다할 것과 또 신정의 취지, 즉 일시동인(一視同仁)의 문화통치를 민중에 보급하여 그 이해를 촉구할 뿐 아니라, 총독통치를 신뢰하도록 이를 지도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되어 여러 가지 적절한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먼저 위의 2가지 사항을 주요방침으로 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이 이외에도 응급조치로 가장 필요한 각종 시설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예를 들면, 노구치 경무국장이 장티푸스로 인해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국장급의 대이동을 단행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폭탄에 의해 부상을 당한 사람들의 사후처리도 정중하게 해주었습니다. 또 서북조선지방의 한해에 대한 구제책을 세웠습니다. 그 당시는 대정 9(1920)년도의 예산이 아직 수립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우선 서둘러 예산을 편성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이상의 일들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것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치안유지에 대해서는 노구치씨를 대신하여 임시로 경구무장 대리를 맡다가, 후에 경무국장으로 전임된 아카이케씨가 주로 이 일을 담당했으므로 이것은 아카이케씨에게 양보할 이야기지만, 단지 두세 가지 제가 그 때 느낀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총독관저에서 조선군사령관, 참모장, 사단장, 헌병사령관들과 치안유지 대책에 대한 상담회의를 열었는데, 치안의 책임은 물론 경무당국자 측으로 이관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육군당국자 측에서도 격의 없는 의견 제안이 있었고, 또 결정한 사항에 대해서는 적극 협력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이때가 9월 8일의 일입니다. 이 상담의 결과 여러 가지 일이 진행되었는데, 극히 비근한 예를 들어 말씀드리면, 총독과 정무총감 관저의 경비를 보다 엄중히 하고, 경찰관 뿐 아니라 위병의 수도 늘이기로 결정하여 실행했습니다. 그 후 무엇보다도 중요한 실적은 새로 부임한 제3부장을 소집하여 치안유지에 대한 방침을 지시했고, 제3부장의 의견을 청취하여 앞으로의 방침을 세울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있었으므로 9월 15일에 제1회 3부장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이 회의는 15일부터 16일, 17일, 18일, 19일까지 계속되었고, 19일 낮에는 정무총감 관저에 특별히 제3부장들을 초대하시어 맛있는 일본요리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여기서도 정무총감은 계속하여 노고를 위로했을 뿐만 아니라, 회의와 같은 딱딱한 분위기를 떠나 격의 없는 의견교환이 있었습니다. 이때에 제3부장들은 시국의 중대함을 더욱 뼈저리게 느낌과 동시에 결사적 태도로 치안유지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던 것입니다. 이 당시의 상세한 상황은 ‘조선총독부 시정년보’에도 실려 있습니다만 제 일기를 보면, 그 때 미즈노 총감의 훈시가 열성에 넘쳐 있었고, 평상시의 냉정한 태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는 이 회의를 그만큼 중대시하여 모든 지성과 열성을 다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고, 제3부장들을 격려 지도하려는 노력의 결과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카이케 경무국장도 이 때 아주 장시간에 걸쳐 주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는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일깨우는 실로 신중에 신중을 더한 내용이었습니다. 치안유지의 건에 대해서는 아카이케씨나 마루야마군의 전문적인 말씀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므로 저는 이 정도에서 마치겠습니다.“

 

● 민심의 안정과 오해 일소

신정(新政)의 취지를 선전함에 있어서는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9월 3일 총독의 시정방침에 대한 훈시가 있었고, 훈시 내용에 관리 및 공리가 지향해야 할 바가 제시되었습니다. 또한 일반 민중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취지의 성명을 낼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시어 ‘유고’를 내시게 되었습니다. 이는 7일부터 준비를 시작해 문자의 추고를 더해 정무총감, 총독의 결재를 거친 후, 공보에 실은 것은 9일 자였습니다. 이는 총독의 시정방침에 관한 훈기의 취지를 간단명료하게 줄인 것으로 총독시정을 신뢰하고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하라는 의미의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훈시나 유고를 내는데 있어, 이 훈시와 유고의 취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조선민중에게 선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같이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당시 사정을 말씀드리면, 조선민중은 총독통치에 대해 극단적인 오해를 하고 있었고, 또한 당치도 않은 선전을 그대로 믿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즉 그들 사이에서는 조선은 이미 독립하고 있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가 얼마 안 있으면 조선으로 들어와서 실제적으로 정권을 잡을 것이라는 식의 유언비어를 믿는 자도 있었습니다. 또 조선의 독립에 대해서 미국은 물론이지만, 그 이외의 세계 각국도 매우 동조하고 있어 원조해 줄 것이라고 잘못 믿고 있는 자도 있었습니다. 이번 신정이 우리 민중의 이익과 행복을 증진시키기에 너무나도 유효적절한 것을 전혀 모르는 듯 한 상황이었습니다. 때문에 이같이 동요하고 있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도 신정의 취지를 가능한 한 빨리 알려, 불온한 조선인의 악선전이 거짓이라는 것과 조선독립 따위는 도저히 실현 가능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 사실에도 위배된다는 것을 긴급히 알릴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조선 내에서의 선전 내용이지만, 그 당시 정세로 볼 때, 조선 내의 민중들이 심히 흔들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내에서도 조선이라는 곳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소요를 극단적으로 중대시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아주 경시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또 조선은 이미 일본의 영토이고, 조선민중은 폐하의 적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외국의 국토인 양, 외국인 국민의 양 느끼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해외 실상을 보면, 특히 미국에서는 한국독립운동과 미국에서 조선에 와 있는 일부 선교사들의 교묘한 선전에 현혹되어 종래의 조선 통치는 마치 인도에 반한 것이고, 정의를 결한 것이며, 조선인의 이익과 행복을 전혀 무시한 정치라고 오해하여 이에 대해 오히려 조선의 독립소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를 원조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내외 정세로 인해 당시의 시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고, 혼미에 혼미를 거듭했던 실정이었습니다.

 

● 지방 유력자의 소집

이러한 오해를 일소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우선 무엇보다도 조선 내의 민심을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응급조치를 강구했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조선에 있는 지방 유력자 중에서 적당한 사람을 추천 받아 이들에게 조선 신정의 취지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 다음, 이들이 각자 지방에 돌아가 신정의 취지를 선전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9월19일부터 지방 선전을 위한 강습회라는 모임을 중추원에서 가졌고, 지사가 뽑아 보낸 각 지방에서 온 51명의 유력자에 대해 세계의 대세를 알리고, 신정의 취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적당한 사람들을 강사로 초빙하여 강연하게 했습니다. 강연은 19일부터 23일에 걸쳐 있었고, 24일 밤에는 총독관저에서 이들을 초대하여 총독이 직접 정중한 만찬을 베푼 후, 기념품으로 대리석 탁상시계를 주었습니다. 이 때 강사로 초빙되었던 사람들로서는 일본인에는 야마가타 이소오(山縣 五十雄)씨, 조선인에는 유일선(柳一宣)씨, 선우순(鮮于金筍)씨 등이었습니다. 또한 노무라(野村) 대장(당시 해군대좌)이 일부러 일본에서 조선까지 와 베르사이유 평화회의의 상황을 기초로 세계정세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던 것도 이때의 일이었습니다. 이들 51명의 지방유지들은 각 도의 장관으로부터 추천된 자들로 과거부터 친일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지방에서 명망을 받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내심으로부터 총독부의 시정에 대해 찬동할 결심이 서 있었는가 하면, 좀처럼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조선의 형세가 극히 불온하고 민중들 모두가 독립사상에 젖어 있었던 때였기에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확실한 태도를 정하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강습을 받고, 이번의 시정방침은 조선민중의 의사를 참작해서 계획된 것이고, 종래와는 달리 문화통치를 실시할 것이라는 내용을 이해하고 돌아가는 듯했습니다. 이들이 지방에 돌아가 드디어 시정의 취지를 선전하게 되었는데, 그 즉시는 생각한 만큼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 정략적인 투자가 기초가 되어 점차 통치의 새 방침을 민중들이 이해하는데, 초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음에 취한 수단은 지방 정세를 시찰하고, 신정의 취지를 선전하기 위해 총독부 사무관을 각 도에 파견했습니다. 이 명령을 받았던 사무관은 6명이었는데 이들이 즉시 출장을 나가서 각 지방에서 민심의 추이를 조사하고, 민중의 목소리를 듣고 돌아와 총독, 정무총감에게 그 실상을 보고하게 했습니다.

 

● 조선인의 일본 시찰 장려

다음에는 친일사상을 가지고 활약하고 있는 조선 유력자들에게 총독부가 정신적 및 물질적 원조를 함으로써 그 활동을 장려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민원식(閔元植)씨가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던 협성회(協成會)라든가 선우순(鮮于金筍)씨의 대동동지회(大東同志會)라는 조직을 이용했습니다. 이들 두 단체는 조선 내부에 있는 거의 모든 단체가 민족자결주의에 탐닉해 있거나, 상해임시정부의 지지를 얻는 상태에서 이와 관련된 단체에 가담하는 것이 아무래도 조선을 위하는 일 일뿐 아니라, 애국자가 되는 길이라는 기분에 팽배해 있을 때 별도의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결성된 단체였습니다. 그로 인해 일반민중으로부터 빈축을 샀고, 욕을 먹기도 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자기주장을 펴면서 일본과 조선이 한 몸이 되어 일본통치하에 보조를 맞추어 나가는 것이 조선 민중 최후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발기한 바, 이는 대서특필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들 단체도 당초에는 충분히 활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만, 총독통치가 점차 실적을 올려감에 따라 이들 단체의 세력도 점차 확장되어 갔던 것입니다. 신정의 취지를 선전하는 것과 관련하여 실행되었던 또 하나의 일은 조선인의 일본 시찰을 장려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전에도 학교 교원들 중에는 가끔 일본을 시찰할 기회가 있었긴 했습니다만, 극히 드물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일본 문화의 진보발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이 때문에 일본 정치에 대한 신뢰감이 약했던 것입니다. 일본을 다녀와서 그 문화의 선진 상황을 보고 알게 됨으로써 이번의 신 시정에 대해서도 신뢰감이 고양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견지에서 가능한 한 관공리와 교원 같은 자들이 일본을 시찰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강구했던 것입니다. 또한 일본 시찰을 가게 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본의 지방관들에게 총독이 직접 편지나 전보를 쳐 이들에 대한 대우나 시찰 등에 대해 충분히 호의를 표해 달라는 뜻을 당부해 보냈습니다. 그 해 11월 미즈노총감이 도쿄 출장 오셨을 때, 마침 우연히도 조선에서 온 보통학교 교원들이 일본시찰을 와 도쿄에 들렀을 때였기 때문에 쓰키지(築地)에 있는 정양헌에 초대하여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기도 하셨습니다. 이 때 정무총감은 그들에게 일본 사정을 상세히 말씀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도쿄부 지사 등에게도 각별히 당부한 결과 도쿄부 지방개량협회가 이들 모두를 접대하여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시찰여행은 1920(大正 9)년, 1921년에 이르러 더욱 활발하게 추진되었지만, 그 시초는 사이토 총독이 부임한 직후부터였다고 생각됩니다.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일본을 시찰하게 하는 것 뿐 아니라, 일본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선을 시찰하게 하는 사업도 매우 필요했습니다. 이 일은 1919(大正 8)년 중에는 그다지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만,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만은 그 당시에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조선의 지방관 및 제 3부장회의에 일본지사와 경찰부장이 임석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일본에서 열리는 지방장관회의, 경찰부장회의는 조선의 지방장관 및 경찰부장이 임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일본에서 조선으로 시찰하러 온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함과 동시에 이들에게도 조선의 시책 상황을 알리기로 했습니다. 이를 위해 참고용으로 팸플릿을 만들거나 사진첩을 제작하기로 했지만, 종국에는 급속히 조선사정을 일본에 알리기 위해 아무래도 보편적인 활동사진을 이용하는 것이 적절하겠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활동사진을 제작하기 위한 시설을 하기로 했습니다. 활동사진은 단지 조선 내부의 사정을 일본사람들에게 알리는 작업에만 그치지 않고, 일본 문화의 발달상을 조선인에게 알리고 상호의 상황을 소개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데서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상세한 계획을 세운 후, 도쿄에서 활동사진 기사를 초빙하여 총독부 촉탁으로 발령을 냈고, 조선 및 일본 사정을 활동사진으로 촬영하여 이를 일반시민에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일을 추진함에 있어, 지금 시점에서 돌아보아도 꽤 기억에 남을만한 일들이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서 조선 사람들에게 도쿄의 사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니쥬바시(二重橋)나 도쿄역이나 마루노우치(丸ノ內)나 그 이외의 훌륭한 건축물이 있는 곳을 보여 주면, 배일 조선인 중에는 「저것은 허위사진이다. 영국이나 미국 어딘가의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하면서 진짜가 아니라고 우기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 후 조선의 각 군 군수들이 일본 시찰을 떠날 때에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그 무리에 같이 딸려 보내 그들도 함께 활동사진을 찍게 했습니다.<격주 월요 연재>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