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하나의 이론은 ‘가정-추론-예측-검증-채택’이라는 다섯 관문을 거쳐야 성립된다. 경험 혹은 합리적 의심을 바탕으로 명제(命題)가 가정(假定)되면 이것을 바탕으로 어떤 사실을 추론(推論)한다. 그 후 여기에 검증을 유효하게 만들 논리를 배당한다. 이것이 예측(豫測)이다. 이 논리적 연관성이 진리집합의 원소인가를 검증(檢證)한 뒤 그것이 ‘참’이면 이를 이론(理論)으로 채택하는 것이다. 이 다섯 단계를 거치는 동안 논리에 오류가 없다면 이 이론은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성립된 이론이 오히려 진리와 상반될 가능성을 가진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부끄럽게도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개혁에 관한 개념들이 겪는 근본적 오류가 그 가능성에 자리를 틀고 있다.

그러한 사실의 가장 큰 원인은 인식대상의 오류로부터 온다. ‘학생들이 교실에서 휴대폰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한다면’이란 전제로부터 ‘학습에 장애가 될 것이다’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을 예로 들어 보자. 이는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갖는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이 휴대폰을 주로 게임이나 SNS에 사용하도록 강요된 인식하에 있다면 이런 가설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수업 중에 지식이나 정보의 검색을 위해 휴대폰을 사용한다는 개념이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있지 않다. 만일 아이들이 교실에서 공부의 수단으로 휴대폰을 사용하는 습관을 배웠다면 이는 정 반대의 가정과 가설과 검증과정을 거칠 것이며 따라서 정 반대의 명제를 성립시킬 수 있을 것이다.

통계를 위한 자료조사에서 가장 위험성이 있는 부분이 바로 자료의 설계이다. 원하는 결론을 위한 자료를 선택해 놓고 행하는 통계조사는 그야말로 조사자의 의도를 객관화시킬 방법으로써만 기능한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국어를 하고,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영어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어떤 아이를 미국에서 출산해서 미국에서 자라게 해 놓고 “사람은 태어나면 영어를 한다”라는 명제를 수립한 뒤, 이를 검증할 자료로서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만을 선택한다면 이 명제는 당연히 이론의 자격을 얻을 수 없다. 이 명제는 최소한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은 영어를 한다”라는 것으로 고쳐져야 한다. 가설과 그의 이론화를 위한 실험대상으로써의 자료를 논리적으로 연관시킨 다음에만 그 가설은 이론으로써의 자격을 위한 행렬에 가담할 수 있는 것이다.

교육개혁의 내용과 그 과정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 이러한 종류의 오류를 개선하는 일은 교육개혁 자체에 본질적 성립가능성을 부여하는 일이다. 수업시간에 휴대폰을 사용하여 교육의 효율을 높이는 방법은 이미 성공한 예들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결과들이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모범적인 학생들을 모아 놓은 집단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단박에 치부된다면 교실에서의 휴대폰 사용이라는 사실은 무조건 긍정성을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이는 서울로 가는 것을 상정한 채 부산으로 가는 열차에 타고 서울이 나오지 않는 이유를 분석한 뒤 고속버스로 갈아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과 같다. 기차에서 고속버스로 갈아타면 서울이 나올 것이라는 믿음의 근거는 이미 왜곡된 근거 안에 있는 자료에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교사라는 단 한 명의 배우가 모노드라마를 이끄는 무대가 현재의 교실이다. 이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서 교사는 아이들과 대화할 능력이 있음을 우리 모두는 믿어야 한다. 아이들은 선생님과 의사소통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믿어야 한다. 그리고 시험이 아니라 시험 점수만을 대비하는, 그래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오직 인생의 본질을 외면하고 형식만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저 안타까운 진도(進度) 시스템을 거두어야 한다. 교실은 미리 정해진 진도를 나가는 장소이며 여기에서 뒤처지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저 패배자로만 규정할 수밖에 없는 이 제도를 왜 우리는 금과옥조(金科玉條)보다 더 귀중한 객체로 대우하고 있는가? 교사와 학생들이 같이 생각할 과제를 놓고 서로 돕기 위해 인격의 흐름으로 서로를 묶는 것, 휴대폰이나 PDA등의 기계는 학습의 보조수단으로 역할하게 하는 것, 비난과 비하(卑下)대신 칭찬과 용기로 아이들의 성장에 철학적 향기를 더하는 것, 이 모든 것은 현재 이 시간 너무도 쉽게 이룰 수 있는 것들이다. 다만 그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의 의견만이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통계의 자료로 선택되고 있을 뿐이다.

교육은 이 상황으로부터 먼 곳에 있다. 공부의 내용은 다 까먹더라도 점수만 나오면 된다는 왜곡된 관념을 버려야만 교육은 의미를 갖는 개념이다. 그 곳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이론에게 교육개혁의 토대를 내어주어야 한다. 그것만이 교육개혁의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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