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팔 논설위원 / 소설가

(박희팔 논설위원 / 소설가) 지난 날, 지체 낮은 집에서 지체 높은 집과 여러 번 혼인함으로써 행세를 하게 된 양반을 ‘치마양반’이라 했다. 치마라는 게, ‘여자의 아랫도리에 입는 겉옷’을 이르는 말이라 남존여비사상에서 나온 말인지, 아니면 왕조 때, ‘벼슬한 양반이 조복(朝服)이나 제복(祭服)의 아래에 덧 두르던 옷’이란 말도 있으니 이에서 나온 말인지? 여하튼 신분상승에 대한 열망이 엿보인다. 이렇게 치마양반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결점이나 모자란 걸 고치고 채워보려고 한다. 그런데 그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당대에 안 되면 대를 이어가면서라도 단계적·지속적으로 애를 써야 한다.

단구양반이 자식을 앞에 앉혀놓고 일장 훈시에 들어갔다. “네 나이 열다섯이니 인제 얼마 있으면 장가를 가야해서 미리 말해두는 것이다. 왜 우리 집을 동네서 ‘단구 네’라고 하는지 아느냐. 우리 식구가 모두 키가 작아서 그렇다. 키가 작은 사람을 ‘오 척 단구(五尺短軀)’라 하고 키가 큰 사람을 ‘육 척 장구(六尺長軀)’라 한 데서 나온 말이지. 이게 얼마나 나한테는 한 맺히는 말인지 모른다. 그런데 니도 이 애비를 닮아서 니 또래들보다 많이 작다. 아마 니도 그걸 느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더 크게 느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니 엄마는 나보다도 더 작다. 그러니 니가 엄마아버지보다 클 리가 없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니 대에서부터 종자를 개비해야겠다.” “예? 종자를 개비해요?” “그래, 니 자식부터는 너보다 키가 커야겠다는 말이다. 그럴라면 니가 너보다 큰 색시를 얻어야 해, 말이 있다. 색시가 신랑보다 크면 애비보다 큰 자식이 나온다고. 생각해보니 그 이치가 맞을 것 같아 하는 소리다. 물론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 하지만 이 애비도 힘을 써보겠으니 니도 무조건 다른 것은 보지 말고 너보다 키가 큰 색시만 골라라. 이 애비 말 명심해야 한다.” 심각한 표정의 간곡한 아버지 말씀도 그러려니와 자신도 키가 작은 게 싫어서 이 자식은 무조건 사지 멀쩡한 키 큰 색시만을 고르느라 또래들보다 늦은 나이에 장가를 들었다. 그리고 첫아들을 낳아 그 애가 장성을 했는데 정말로 자신보다 키가 크다. 그래도 아직 흡족하지 못해서 그 자식을 앉혀놓고 선친의 그 종자개비 론을 펼쳤다. 그랬더니 그 아들놈도 아버지의 뜻을 명심하고 무조건 사지 멀쩡하고 저보다 키 큰 색시만을 찾았다. 그게 어렵사리 성공해서 자신보다 키 큰 아들을 보았다. 해서 인제 키에 대한 선대들의 한을 풀게 되었다고 대견해 했다. 한데 이 아들 애가 장가를 들려는데 수월하지를 않다. 웨래 윗대들이 장가갈 때보다도 더 힘이 든다. “저 단구네 말여, 그렇게 대를 이어가며 색시가 사지 멀쩡하고 키만 크면 혼인을 하더니 그게 탈난 것 같어.” “여보게 그 집은 이제 단구를 면했는데 자꾸 ‘단구 네’ ‘단구 네’ 하는가. 그건 그렇구, 자네 말은 그 집 아들애가 저렇게 좀 어리석어서 쓸모가 적은 건 그 윗대들이 무조건 키만 크면 색시로 맞아들여서 그렇게 됐다는겨?” “저 사람 말 백 번 틀린 건 아녀. 그래서 예전부터 그 집의 내력을 알어보기두 하구 사람의 됨됨이도 따져보구 했잖여 다 뜻이 있는겨.” “그려, 그렇기는 하다만 어디 다 그런가. 여하튼간에 전 대나 전전 대까지만 해도 사람이 저렇게 치룽구니는 아니었제.” “하여튼 뭐가 잘못되면 별별 생각이 다 나는겨. 그런데 지금 ‘치룽구니’ 라는 말 들어보니 새삼스러우이.” “내도 그려, 도대체 치룽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 많을껴.” “많구말구, 싸리가지로 채롱 비슷하게 엮어서 만든 그릇의 한 가지 아닌가. 뚜껑이 없지 왜.” “채롱이라는 것두 뭔질 몰라요. 껍질을 벗긴 싸리개비로 함처럼 엮어서 만든 그릇인데 말여.” “전엔 이 치룽에다 물건을 넣어가지구 팔러 다니는 장수를 ‘치룽장수’라구 했잖여.” “맞어, 그런디 치룽은 뚜껑이 없는데다가 싸리가지루 함처럼 거칠게 엮은 거라 쓸모가 그리 없어서, 어리석어 쓸모가 적은 사람을 ‘치룽구니’라구 조롱조로 이른겨.”

이 치룽구니 아버진, 자식이 좀 어리석어 혼인의 걸림돌이 된 현실 앞에서 새로운 결심을 한다. 하여 치룽구니를 앞에 앉혔다. “이제는 선대의 종자개비 론은 니 대에서 끝내야겠다. 대신 품종개량을 해야겠어.” “‘품종개량’유?” “그래, 넌 키도 그만하면 후리후리하고 인물도 남 축에 빠지지 않으니 색시 감은 곧 찾을 수 있을 게야. 다만 내도 그러하겠지만 니도 색시 감은 너보단 작아도 빠릿빠릿해 보이는 색시 감을 찾아보자.” 그는 자식의 어리석음이나 모자람을 뜻하는 표현은 쑥 뺐다. “몇 대를 그렇게 이어가야 할 것이다.” “알겠구먼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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