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동양일보 상임이사>

유영선<동양일보 상임이사>

정초에 한 여성모임에 참석했다가 시집을 선물 받았다.
일부러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을 지인의 마음이 와 닿아 가방에 시집을 넣고 다니며 짬나는대로 음미하듯 시를 읽는다.
‘날지 못하는 /새는 있어도
울지 못하는 /새는 없다‘
시인은 길가 담벼락, 온몸의 무게를 들어 폐지를 줍는 ‘당신’을 보고 시를 썼지만, 나는 내 안의 이야기를 시에 실어 시를 이해한다. 시인은 반달을 ‘반은 희고, 반은 밝았다’고 보았지만, 나의 반달은 늘 반은 빛나고, 반은 숨어있다. 시를 읽는 맛은 이렇게 서로가 달라서 좋다. 달달하고 새콤하고 쓸쓸하고 그리운, 그때그때 읽는 이의 감정이 이입되는 것. 그래서 시가 읽히고 시가 사랑받는 것이다.
시 만이 아니다. 소설을 읽을 때면 어느새 소설 속 주인공으로 감정이입이 되어 현실이 아닌 허구속 세계, 시공을 넘나드는 상상의 세계에서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이제 이런 감정들은 점차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고 있다. 화려한 영상미디어들이 손끝에 놓이면서 ‘문학은 죽었다’고들 말한다.
대한민국 성인 남녀의 40%는 1년에 책을 단 한 권도 안읽는다 하고, 책을 사는 인구가 점점 줄어서 동네서점들이 문을 닫기 시작한 지는 벌써 오래전의 일이 되었다. 하물며 두꺼운 고전을 손에 들고 밤새워 책을 읽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주변에서 소설을 쓴다거나, 시를 쓰겠다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은 엉뚱하거나 현실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되기 일쑤다. TV 드라마 원고를 쓴다고 해야 돈 좀 만지는 작가로 취급하는 이 시대에서 문학은 영영 외면 받는가 생각하면 왠지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답답하고 속이 상할 뿐이다.
그런데 최근 이런 분위기를 불식하듯 기쁜 상황을 보았다. 동양일보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무영신인문학상 소설 공모에 예상을 벗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원고를 보내온 것이다. 처음엔 10편, 15편 씩 들어오더니 마감일이 가까워지자 하루에 수십 편씩 도착해 무려 삼백 편에 가까운 창작 소설이 들어온 것이다. 응모자의 지역도 전국에서, 그리고 멀리 해외에서까지 수십 편을 보내와 담당자들이 즐거운 비명을 냈다.
사실 올해부터 무영문학상을 신인문학상으로 돌린 뒤 공모 마감을 앞두고 조금 긴장을 했었다. 무영문학상의 역사는 18년이나 되지만, 그동안은 기성작가를 대상으로 1년 동안 매체나 작품집으로 발표한 작품 중에서 가장 빼어난 친자연적인 소설을 선정해 시상해 왔기 때문에, 이런 고민은 없었다. 그러나 신인문학상으로 전환한 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써서 응모를 할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문학이 외면 받는 시대, 작가가 되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도 미지수였지만, 창작에 따른 작고 시간이 시나 수필과 달리 긴 시간을 요하는 소설 한 가지 장르만을 응모 받는 것이 쉽지는 않으리라 여겨졌었다. 더구나 무영문학상의 역사는 길지만, 직접 공모를 한 신인문학상으로는 1회 행사가 아닌가. 그런데 우려를 딛고 수많은 예비소설가들이 작품을 보내온 것을 보면서 ‘아 아직도 우리 사회에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란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하긴 이러한 감정은 지용신인문학상 공모와 동양일보신인문학상 공모 때도 늘 느끼는 일이다.
이미 2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신인문학상들이기 때문에 마감일에 맞춰 수많은 작품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되었지만, 생각해보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일인가. 시인이, 수필가가, 동화작가가, 소설가가 되기 위해 수없는 시간을 고뇌하고 성찰하며 창작에 몰두하는 그들이 있어서 문학은 죽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인공지능 AI가 판을 치는 시대라 해도 인간의 상상력과 감정을 지키는 한 세상을 메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도 동양일보는 이런 작업에 동참하고 있다. 문학은 삶의 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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