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포럼 필진의 무술년 새해인사(1) /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

새해에, 한국어의 탁월함을 생각한다

 

오구라 기조 교수

저는 일찍이 한국을 알게 되고, 한국말의 특출한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해 왔습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저 자신이 느낀 한국어의 탁월함을 다시금 확인해 보렵니다.

 

● ‘아름답다’…우주적인 미(美)

한국어의 ‘아름답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우주의 울림’과 같은 것을 느낍니다. 이 아름다운 말의 어원에는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유력한 것으로는 ‘아람’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알다’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람’은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지기 직전의, 완전한 구형의 상태인 밤과 같은 열매를 말합니다. 형태로서 조금도 찌그러진 데가 없고 생명력이 절정에 이른 때이며, 따라서 완벽한 상태입니다. 이 ‘아람’은 ‘알’과 분명 관련이 있습니다. 알처럼 생명력으로 충만하며 완벽한 형태는 한민족의 근원적인 미의식의 원천이라고 생각됩니다.

‘알’의 알맹이가 충만해지면 ‘알차다’는 상태가 됩니다. ‘차다’의 이상적인 상태는 달이 차오르듯 둥글어지는 것입니다. 이렇듯 가득 차오른 상태가 ‘참(眞)’이므로 한국어에서 ‘참’은 아름답다는 미의식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너스 석상의 가슴처럼 탐스럽고 둥근 구체의 생명력이 진리라는 견고한 절대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한국어 ‘참’ 은 서양철학의 진리 같은 딱딱하고 차가운 개념이 아니라 탱탱하고 생기가 넘치는 생명의 공처럼 탄력성으로 가득 찬 개념입니다. 그리고 ‘아름답다’의 어원 중 또 다른 설에 ‘알다’가 있다는 사실은 한국인의 ‘참(眞)’뿐만 아니라 ‘지(知)’ 또한 생명력과 생기가 넘치는 ‘미’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어의 ‘아름답다’는 생명, 완벽함, 구(球), 진리, 지와 같은 개념과 관계가 있으며 이러한 표현의 저변에 있는 공통된 생각은 보편성에 대한 희구 그리고 그 보편성과 합일하는 순간성의 놀라움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까지 승화될 수 있는 생각인 듯 싶습니다.

‘구(球)’야말로 가장 보편적인 형태입니다. 한국인은 보편적인 형태에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보편성의 궁극에 있는 것은 우주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한국어로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이 완벽한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되는 듯한, 궁극의 보편성과 합체되는 듯한 감각일 것입니다.

 

● 미의식과 보편성·도덕성

‘아름답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한국어의 미의식에 깃들어 있는 것은 보편성에 대한 강렬한 지향성이자 동시에 강한 도덕지향성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 신화를 살펴보면 한국인은 처음부터 도덕지향적입니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말이 이러한 사실을 나타냅니다. 단군신화에서 환인이 이야기한 것은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이상주의 색채가 매우 강한 통치 행위였습니다.

물론 모든 한국인들이 항상 ‘홍익인간’을 떠올리며 생활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원래 도덕적이었다’는 막연한 인식이 뇌리에 있다는 점은 한국인의 미의식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요?

저는 이런 점이 한국인의 보편성에 대한 강렬한 희구와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답다’는 단순히 형태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완벽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보편성은 도덕성을 의미합니다. ‘아름다운 꽃’이나 ‘아름다운 인생’이라는 말은 보편적 가치에 비추었을 때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고, 어떤 꽃이나 어떤 인생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미(美)를 의미합니다. 즉, 이는 살아간다는 행위에 있어서 완전무결한 상태로서 미와 도덕성이 하나가 된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보편성 신앙은 한국인의 생명감각과 미의식의 핵심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곱다’…시간성의 미

한국어에는 ‘곱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곱다’의 미의식은 주로 시간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름답다’의 시간성은 마치 달이 둥글게 차오를 때처럼 공간적인 미의 절정에 달한 상태의 순간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지금은 꽃들이 활짝 피었지만 그 화려함은 언젠가 사라지고 만다는 예감이 감돕니다. 보편은 언젠가 보편성을 잃는다는 위태로움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곱다’의 시간성은 ‘축적’이라는 방향성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곱게 나이 드신 할머니’나 ‘곱게 자란 자매’ 와 같은 표현의 경우, 여기에서 ‘곱게’는 지금까지 축적되어 온 시간이 조금씩 세심하게 쌓아 올려졌다, 혹은 짜였다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이 세심함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답습니다. 시간을 소중히 다루고 시간에 대해 섬세하게 의식함으로써 그 시간을 살아가는 삶의 질이 서서히 높아집니다. 이것이 ‘곱게’의 세계이겠지요.

‘고운 피부’나 ‘고운 마음씨’와 같은 표현도 피부나 마음이 지금까지 경험해온 차분한 시간성을 느끼게 합니다. 물론 미(美)에 대한 표현이니 ‘곱다’도 어느 정도 보편성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는 ‘아름답다’처럼 완전무결하다기 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 하나하나의 특수한 경험을 섬세하게 내면화·내성화함에 따라 생겨난 미입니다. 즉, ‘아름답다’가 보편적인 미의 절정을 의미하기 때문에 항상 그 절정의 순간성에 구속되어 미에 대한 불안을 표현하고 있는 데 비해, ‘곱다’는 시간의 지속성 속에서 경험을 내면화·내성화해온 역사성을 승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미의 안전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 생명은 비유인가?

이러한 한국적 미의식의 배경을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명에 대한 세계관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그림에 그려진 파도에는 바다의 생명이 약동하고 있다.’, ‘어린아이들이 쓴 시에서 어린 생명의 소리를 느낄 수 있다.’, 우리는 가끔씩 이런 표현을 씁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이런 식으로 표현해도 우리는 그 뜻을 물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때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단순한 비유일까요? 즉 ‘생명 같은 것’을 ‘생명’ 이라 부르고 있는 걸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생명 같은 것’을 수사적으로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그건 진짜 생명인 것입니다. 비유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물론 비유로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나 경우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 생명일까요? 이것이 생물학적 생명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림에 그려진 파도에 바다의 생물학적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림 속 파도가 생물로서의 유기체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유로서 ‘그러한 유기체적 현상이 이 그림의 표면에서 일어나고 있다(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이야기할 수는 있습니다. 즉 ‘그림 중 파도 부분이 바다의 나머지 부분과 특별한 관계성 아래 동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이 지극히 우연하게 유기체적인 생생함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우연함이야말로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뛰어난 재능을 드러내는 것이다’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으며, 우리는 그런 말을 접해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의 파도에는 생명이 있다’라고 우리가 이야기할 때, 정말로 그런 비유가 우리와 그림 사이를 확연하게 나누어 버리는 걸까요? 즉 이쪽에 ‘내’가 있고, 저쪽에 ‘그림의 파도’가 있으며, ‘나’와 관계없이 ‘파도’가 유기체적 현상으로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을 ‘내’가 생명으로서 느끼고 있다…라는 도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경우도 물론 있을 겁니다. 그러나 더 절박한 생명감각을 경험할 때, 우리는 다른 차원을 향해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림을 보고 정말로 감동했을 때, 우리와 그림 사이에 비유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림 속에 빠져들고, 그림은 내 안으로 침입하며, 양쪽은 제 윤곽을 상실할 뻔했다가 간신히 유지하면서, 어딘지 잘 알 수 없는 곳에서 생생한 느낌이 기묘하게 치솟아 오르는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다시 말하면 그 ‘생명’은 대상이 지니는 것이 아니라, 또는 대상에서 현상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과 객관 ‘사이’에 치솟아 오르듯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상이 유기체적 성질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관과 객관이 혼재(混在)하는 곳에 생명감각이 홀연히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을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로는, ‘이 그림에 그려진 파도에는 바다의 생명이 약동하고 있다.’라는 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마치 ‘바다의 생명’이라는 ‘물체’가 주관과는 따로 존재하는 것 같이 착각하고 마는 것이지만, 사실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그림의 파도를 봤을 때, 나와 그림을 포함한 그 사이 어딘가에 바다가 생명으로서 약동적으로 나타났다.’ 라고 표현해야 옳은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 ‘(주관과 대상이 혼재하는)그 사이 어딘가’라는 공간은, 물론 일상적인 의미의 ‘장소’나 ‘어딘가’가 아니라, 일상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진 비밀의 비공간(非空間)이 아닌가 싶습니다.

 

● 영원한 생명

이 특이한 생명감각이 일어나는 비밀의 비공간에서 느껴지는 것은 생물학적 생명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명이 떠다니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인류의 생명관에 관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 생명감각에 가까운 것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그리고 아마 어떤 문명권에서도, 인류는 육체적, 즉 생명학적인 생명과는 다른 별도의 생명을 발견 내지 발명했습니다. 그것은 아마 ‘하나(일)’라는 개념의 발견 내지 발명과 연동(連動)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의 생명’입니다. 요한복음서 등에 명확히 거론되어 있고, 사도 바울에 의해 대대적으로 전개된 관념입니다. 이것은 ‘육체적 생명을 중요시하지 말라.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유일한 신이 주시는 영의 생명이다.’라는 일신교적인 생명관의 절정입니다. 하나 하나의 개체가 가지는 육체적 생명의 개별성, 한정성을 초월하고, 그것들을 모두 하나의 생명으로 회수하고 환원시킵니다. 그리고 영의 생명만이 온갖 한정성을 뛰어넘어 영원히 살아갑니다.

이 생명관이야말로, 인간이 ‘하나(일)’라는 관념을 극도로 추구하지 않으면 탄생할 수 없는 사고입니다. 일신교와 생명의 불멸성은 강력하게 결합된 체계이며, 이것이 인류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생명관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개개의 육체적 생명의 한정성을 뛰어넘는 사상은 일신교에서만 발달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장자’의 생명관에서 그것이 잘 실현되어 있습니다. ‘장자’ 내편 대종사편에서 생사(生死)는 운명인 것이며(“死生命也”), 죽음이란 잠깐 쉬는 것(息)입니다. 하나하나의 생명은 우주 전체의 운행 속에서 우연히 뜨다가 다시 가라앉는 부유물 같은 것이며, 그 부침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유형의 세계관에서는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생명은 그것들이 개별적이라는 이유로 한정되어 있고,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초월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세계관을 ‘범령론(汎靈論)’이라는 이름으로 일괄해서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은 아주 넓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를 ‘물질이 아닌 스피리츄얼(spiritual)한 존재’로 정의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범령론’은 ‘이 우주는 물질이 아닌 스피리츄얼한 존재(영)가 지배하거나 충만해 있다’라는 세계관을 가리키게 됩니다. 물질이 존재해도 상관없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영적인, 정신적인 존재가 보편적으로 지배하거나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면 그 세계관은 ‘범령론’입니다. 이 분류에서는 기독교의 ‘영의 생명’도 중국의 도가나 유가의 ‘도’나 ‘기(氣)’도 ‘범령론’적인 생명입니다. 기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생명력을 가지는 영적인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 또 하나의 생명

이 ‘범령론’적인 생명은 영원히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이야기한 ‘바다의 생명’은 이 범주에 속하는 생명일까요? 다시 말하면 그 파도는 우주의 생명이나 본질을 약동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생명처럼 보이는 것일까요?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서양에서도 동양에서도 이데아나 도, 혹은 기라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존재와 미의 관계론이 예술론의 주류를 이루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림에 그려진 파도에서 생명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영원하고 보편적인 존재나 본질 자체에 접근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생명감각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을 저는 ‘또 하나의 생명’ 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없을까요?

우리들에게 가장 가까운 생명은 육체적 생명, 즉 생물학적 생명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개별성, 한계성을 강하게 느낀 사람들이 보편적인 ‘하나’의 생명을 신앙하게 됩니다. 여기서 전자를 ‘제1의 생명’이라 부르기로 하고, 후자를 ‘제2의 생명’이라 부르기로 합시다. 그렇다면 제가 여기서 이야기한 또 다른 생명감각은 사실상 이 두 가지 생명과는 다른 ‘제3의 생명’이라 부르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제3의 생명’을 느끼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앞에서 이야기한 ‘바다의 생명’입니다. 사실 이 범주의 생명감각에 대해 인류는 지금까지 꽤 많은 논의를 거쳐 왔습니다.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의 아우라(Aura)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생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거죠. 하지만 저는 우발적으로 나타나는 이 ‘사이의 생명’을 ‘제3의 생명’이라고 이름지어 고찰해 보고 싶습니다.

 

● 세 가지 생명

여기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생명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제1의 생명’= 생물학적 생명, 육체적 생명, ‘제2의 생명’=영적 생명, 보편적 생명, ‘제3의 생명’=우발적 생명, 간주관적(間主觀的) 생명. 우리는 모두 ‘제1의 생명’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이 육체에 깃들어 있다고 생각되는 생명입니다. 어떤 식으로 깃들어 있는 것인지는 과학적으로도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요. 이것을 개별적 생명, 상대적 생명, 물질적 생명 또는 ‘하나하나의 생명’, ‘이것의 생명’, ‘그 자체의 생명’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제1의 생명’은 너무나 덧없고, 금방 없어지고 맙니다. 인간은 먼 옛날부터 ‘제1의 생명’의 공허함에 놀랐고, 슬퍼했을 것입니다. 또는 체념하거나 고통을 느꼈을 겁니다. 그런 감정들과 인간이 ‘보편’이라는 개념을 발견한 조건이 합쳐져 이윽고 ‘제1의 생명’과는 구별되는 또 다른 생명이 발견됩니다. 그것은 ‘영원히 사는 생명’입니다. 기독교의 ‘영의 생명’이나 도가사상의 무위자연의 도나 기 등은 전형적인 ‘영생하는 보편적인 생명’입니다. 이 범주의 생명을 저는 ‘제2의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집단적 생명, 절대적 생명, 종교적 생명, 정신적 생명, 보편적 생명, 비물질적 생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며, 또 ‘모두의 생명’, ‘초월하는 생명’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개별적이고 한계성이 있는 ‘제1의 생명’을 뛰어넘는 생명입니다. 이 ‘제2 의 생명’이야말로 가장 수준 높고 가장 보편적인 생명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또 하나의 생명 즉 ‘제3의 생명’은 ‘문득 나타나는 생명’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에 우발적으로 나타나는 생명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그것을 ‘미(美)’라든가 ‘아우라’라든가 ‘모노노 아와레 (일본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지만 실은 그것들은 ‘생명’인 것입니다. 다만 그것들은 육체적인 생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에 생명과는 다른 이름으로 표현되어 왔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이 그림에는 생명이 있다’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은 비유가 아니라 진짜 생명을 정확히 이야기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겠는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육체적인 ‘제1의 생명’도 아니고 영적인 ‘제2의 생명’도 아니기 때문에 ‘제3의 생명’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제3의 생명’은 간주관적(間主觀的) 생명, 우발적 생명, 미적(美的) 생명이며, 다른 말로 하면 ‘사이의 생명’, ‘나타나는 생명’입니다. 생명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면서 원래 주제인 한국어의 미의식이라는 내용에서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이제 원래 주제로 돌아가겠습니다.

 

● ‘생각’, ‘한’, ‘멋’ ... 한국어의 미의식과 생명

저는 ‘생각’, ‘한’, ‘멋’이라는 한국어에 ‘제3의 생명’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에 관해서는 동양포럼주간이신 김태창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 말의 본래 문자는 ‘생각’이며 이는 글자 그대로 ‘생명의 각성’을 나타내는 것이겠습니다. 즉 한국어의 ‘생각하다’는 합리적인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약동(Elan Vital)을 수반하는 행위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생각하다’에 관한 김태창 선생님의 이러한 해석을 따르고자 합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생각하다’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 번째는 ‘생각’의 ‘생’을 육체적인 ‘제1의 생명’이라고 파악하여 ‘생각하다’란 육체적 생명이 각성하는 작용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생각’의 ‘생’을 영적인 ‘제2의 생명’이라고 파악하여 ‘생각하다’ 란 우주의 보편적인 섭리를 각성하는 작용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生覺)하다’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의 ‘생’을 육체적인 ‘제1의 생명’과 보편적인 ‘제2의 생명’이 아니라 우발적인 ‘제3의 생명’이라고 해석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생각하다’는 일상의 한 순간 한 순간에 불꽃처럼 번쩍이는 미적인 감동과 정감을 지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다’라는 아주 평범한 행위 자체가 한국어의 세계에서는 개개의 육체적 생명의 각성과 우주의 보편적 생명의 각성, 그리고 일상에서의 미적 순간의 지각이라는 다양한 층위를 포함한 생명적 행위인 것입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까요? 다음은 ‘한’입니다. ‘한’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부정적인 감정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미의식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한이란 동경이다’라고 해석합니다. 한국어의 고유어에 동경에 해당하는 어휘가 없고 한자어를 사용하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저는 ‘한’이라는 말이 애초에 ‘동경’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은 이상적인 상태 즉 ‘아름답다’에 대한 동경과, 그 이상적인 상태와 주체가 합치되어 있지 않은 것에 따른 슬픔과 원통함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제가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 ‘한’이라는 말의 뜻이 한일사전에는 ‘うらみ(원망)’라고 나와 있는데, TV 방송에서 한국인이 ‘공부가 한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이해하지 못 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는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집이 가난하여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공부가 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한’은 ‘원망’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부에 대한 동경과 그것이 실현되지 못한 원통함’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이 아닐까요? 이 ‘한’이야말로 한국인의 일상 세계에서 지속과 순간이라는 상반되는 시간성을 응축시킨 미적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속되는 것은 ‘아름답다’라는 보편성에 대한 동경과 원통함입니다. 한국인의 마음을 늘 강한 동경과 원통함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동경을 정적으로 내성화시키면 ‘곱다’라는 미(美)가 됩니다만, 때때로 동경은 고통스러운 원통함과 합체되여 ‘한’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한’이 언젠가는 풀리기를 늘 기원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어느 순간에 기적처럼 ‘한’이 풀리는 일도 있습니다. 이 순간 동경과 원통함은 동시에 해방되어 ‘아름다운 세계’가 개벽합니다. ‘한을 풀다’란 보편적인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는 동경과 그 세계로부터 거부당하고 있는 슬픔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생각되다가 어느 순간 단숨에 작열하듯이 풀리는 순간의 절대적인 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에너지가 강한 ‘제3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멋’입니다. ‘멋’은 한국어에 나타난 ‘제3의 생명’의 미의식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낸 말일 것입니다. ‘멋’은 우주적인 범위를 지닌 말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정신 세계에서는 ‘아름답다’ 같은 보편적인 미의식 즉 ‘제2의 생명’에 의한 세계관이 일본보다 더욱 강하기 때문에, 이 우주적인 보편성에 바람구멍을 내어 우발적인 생명을 나타내려면 그를 위해 필요한 자유의 힘도 강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멋’에 해당되는 일본어 ‘이키’는 지극히 인공적이며 섬세한 정감의 미묘한 작용에 관한 개념입니다만 한국의 ‘멋’은 인간관계 및 사회뿐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자유자재로 발휘됩니다. 보편성의 규범이 지나치게 강하면 ‘멋’은 그곳에 자유를 위한 바람구멍을 냅니다. ‘아름답다’는 보편적인 미이지만, 이 보편성이 틀에 박히면 억압이 되고 맙니다. 그때 ‘멋’은 미의 헤게모니를 해체시키거나 흐트러트립니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미가 ‘제2의 생명’관에 기초하고 있다면 ‘멋’은 ‘제3의 생명’에 기초한 미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은 저자가 2016년 1월 9일 이화여대에서 강연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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