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영

안태영 <제천 의림여중 교장>

해 지기 전에 해로 들어가는 노을이 서럽게 물들고 노란 은행잎이 일제히 투신자살이라도 하듯 떨어지는 어느 날, 담임을 맡았던 제자 앞에 나는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향불처럼 3년 전의 일이 아릿하게 피어올랐다.
교정엔 벚꽃이 만개해서 벌들을 유혹하는 어느 봄날 오후였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 있는 5월이면 잊지 않고 어김없이 선물을 보내주는 제자가 찾아왔다. 옆에는 키 크고 잘 생긴 젊은이가 선물 꾸러미를 들고 동행했다. 차를 마실 때, 제자가 결혼 청첩장을 살며시 내밀었다.
“선생님께서 저보다 더 간절히 바라던 그 결혼을 하려고요. 선생님께 주례를 부탁드리려고 이렇게 찾아뵈었어요.”
나는 제자의 주례 청탁을 완강히 거절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나는 자격이 없다는 걸 나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도 완강히 버티면서 내가 주례를 서주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엄포가 안 통하자 연민 시리즈로 급선회했다.
고3 때 학급 반장 하면서 선생님 몰래 고생한 이야기, 마음 코드 맞는 신랑감 구하느라 해가 바뀌면?마흔 살 되는 제자가 결혼 한 번 해보겠다고 청주에서 제천까지 먼 길을 선물까지 들고 찾아 왔는데…. 나는 그놈의 ‘선물’이라는 말에 혹해서 그만 주례를 응낙하고 말았다.
짧고 단호하되 하객들이 집중해서 듣다가 세 번 정도 웃을 수 있는 내용으로 주례사를 작성해서 나는 제자의 결혼식 주례를 섰다.
시작할 때, 새로 탄생하는 이 부부가 행복하기를 희망하는 분들은 모두 박수를 쳐달라고 했더니 떠들며 얘기하던 하객들이 일제히 손뼉을 쳤다. 박수 소리가 끝났을 때 바로 주례를 시작했고 5분도 채 안 걸려서 끝났다. 그 동안 하객들은 내 예상대로 정확히 세 번 웃었다.
그렇게 제자 부부는 결혼해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다음 해 5월이 다 지나도록 해마다 보내던 선물이 오지 않았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확 다르다더니 결혼해서 신랑만 챙기느라 선물을 못 챙겼나 싶어 제자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를 않았다. 그래서 제자가 근무하는 학교로 전화를 했다. 그러나 제자는 학교에 없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암이 재발해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벼락이 치는 것처럼 정신이 아찔하고 눈앞에 섬광이 번쩍 하고 스쳐갔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느꼈던 불길한 예감이 적중해서 몹시 우울했다.
전에는 이따금 안부 전화를 했었는데, 한동안 잠잠해서 신혼의 단꿈에 빠져서 그런가 보다고 서운함을 달랬었는데….
제자의 남편 전화번호를 어렵게 알아내서 통화를 했다. 새신랑의 목소리엔 슬픔과 고뇌가 진득하게 배어 있어 상황이 많이 나쁘다는 걸 직감했다. 병문안 간다고 했을 때 새신랑이 울면서 말했다. “살이 많이 빠지고 모습이 너무 변해서 아무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요.”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이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제자의 고통과 슬픔이 주례 자격이 없는 내가 주례를 잘못 선 결과처럼 느껴져 비통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제자의 남편이 전화를 했다. 저 세상으로 떠났다며 울었다. 하늘만 멍하게 응시하다가 다음날 이른 새벽에 제자가 누워있는 청주 어느 장례식장에 갔다.
제자 이외에는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서였다. 예상대로 빈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담임선생의 절을 받아서 미안한 지 고인은 머쓱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두 번째 절을 하다가 그냥 엎드려서 한참이나 울었다.
나는 촛불에 향을 붙여 연기로 사라지게 꽂아놓고 고인의 영정 사진을 물끄러미 보았다. 가슴이 아파서 숨도 쉬기 어려웠다. 부조함에 노잣돈을 넣고 나는 제자 곁을 떠났다. 제자도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났다. 서른아홉 살에 결혼해서 자식도 없이 아프다가 마흔 둘에 떠났다.
제자는 떠났어도 차를 마실 때마다 나는 반장을 만난다. 제자가 선물한 찻잔에 피어오르는 향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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