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숲 속의 언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겨울바람은 연신 땅바닥의 낙엽을 다정하게 들추고 있다. 어디선가“따다다 따라라라라”하고 딱따구리가 나무의 표피를 찍는 연발음을 낸다. 나도 이에 질세라, 톱날을 돌려 매끄럽게 나무를 자르고 다듬는다. 두 개의 앞 기둥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살아있는 버드나무를 이용하고 뒷기둥 두 개는 은행나무를 잘라 세운다. 나머지 원두막 바닥과 벽체를 모두 버드나무로 완성할 요량이다. 나는 성급함을 감당하지 못하고“버듣 도서원두막”을 이미 마음속에다 완성하였다.

봄이 되면 봄바람의 성가심을 견디지 못하고 버들가지가 초록으로 머리를 감을 것이다. 버들가지의 머리단장이 끝나기를 기다려 버들의 유서(柳絮)는 솜처럼 가볍게 봄 하늘을 유영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월이 흐를 대로 흘러 모서리가 다 헤진 내 삶은 어찌 할 것인가.

도서원두막의 목걸이 서가(書架)에서 책 한권 뽑아 무릎에 얹고 멍하니, 아무 생각도 없이 정말 멍하니, 버들의 솜털 꽃 나들이나 바라볼 테다. 정말 그들처럼 바람에 영혼을 맡기고 그간 세상에 아무렇게나 들여놓은 발자국과 헝클어진 생각들을 정리하고 세상과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그렇게 멍하니‘버들 도서원두막’에 앉아 있을 테다. 그리하여 봄날이 가면 군살이 집히는 내 욕망 이곳저곳의 다이어트도 끝내리라.

버들은 세계적으로 300여 종이 되고 우리나라만 해도 40여 종이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수양버들과 능수버들인데 구별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능수버들은 1년생 가지가 황록색이고 수양버들은 적자색이다. 중국이 원산지인 수양버들은 양자강 하류에 많이 자라 양자강 물빛을 적자색으로 물들이려고 애를 쓰고 있다. 수나라 양제가 북경에서 항주까지 대 운하를 판 후에 강변에 운치도 있고 물가에서 잘 자라는 버드나무를 심도록 하여 이러한 절경을 후세까지 남겼다. 용의 형상으로 만든 커다란 배에 삼천궁녀를 태우고 버들이 늘어진 운하 위를 구름처럼 흘러가며 양제가 신하들에게 물었다. “저 나무 이름이 무엇인고?”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당장 나무 이름을 지어 올리라는 명이 떨어졌다. 평소 왕이 좋아하는 말을 잘 지어내는 신하들은 즉석에서‘수나라 양제’를 따서‘수양버들’이라 지어 올렸다.

이 대운하가 끝나는 항주에 미인이 많다. 수양제가 삼천궁녀를 싣고 이곳에 왔을 때 양제의 폭정을 참지 못한 농민들이 난을 일으키자 궁녀들을 이곳에 내려놓고 급하게 북경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수양제는 궁녀들을 데리러 오지 못하고 정권을 잃고 말았다. 궁녀들은 항주에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낳은 딸들은 항주를 미인의 고장으로 만드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버들가지는 예로부터 ‘이별과 재회’의 의미를 담고 하늘거린다. ‘천안도 삼거리 능수나 버들’ 노래에도 그런 사연이 담겨 있다. 병역으로 끌려가는 홀아버지와 어린 딸 능소의 천안 삼거리의 작별과 상봉은 버들가지와 관련된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파수’란 강에 ‘파교’라는 다리가 있는데 당시 파교에서 이별을 하면서 수양버들 가지를 꺾어 주는 풍습이 있었다. 이를 파교절류(?橋折柳)’라 한다. '버들류(柳)' 자가 '머물 류(留)' 자와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해 인사를 대신하는 것이다. '떠나지 말고 머물면 안 되느냐' 는 의미이다. 이렇게 시인들은 버들가지를 이별과 재희의 상징으로 형상화하여 시를 읊었다. 이러한 한시의 형태를 ‘절양류(折楊柳)’라 하기도 한다.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늘 가락을 품고 살고, / 매화는 일생 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모습이 남아 있고, / 버드나무 아래 백 번의 이별을 겪어도 그 가지 또 새롭구나. (桐千年老恒藏曲 / 梅一生寒不賣香 / 月到千虧餘本質 / 柳經百別又新枝 )?신흠의 시 동매월류(桐梅月柳)이다. 단양의 관기 두향은 단양군수였던 퇴계 이황에게 이 절양류를 열창하며 사랑을 속삭였다. 이황이 죽자 그녀는 강선대에서 몸을 던져 세상과 이별하였다. 사랑은 만남과 이별의 그리고 죽음의 순환구조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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