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희 팔 (소설가·동양일보 논설위원)

할아버진 딱 남매뿐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그랬다.

“니 할아버진 말이다. 위로 두 살 터울인 누이 하나밖엔 없다. 그 할아버지 누이가 바로 아버지 고모이고 니 대고모시다.”

아버진 이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하고 첫 번째 맞는 설에 대고모께 세배하러 가자며 이렇게 말했다. 그 전엔 한 번도 대고모한테 가본 적이 없다. 그래도 엄마와 아버지가, ‘삭쟁이고모, 삭쟁이고모’ 하는 소리는 들었다. 그리고 아버진 나를 데리고 가기 이전에도 1년에 최소한 한 번씩은 대고모를 찾아뵈었을 거라고 기억한다. 아버진 설날 차례를 지내고는 나를 앞세워 동네의 일가친척이나 어른들을 찾아 세배를 다니는데 그렇게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서 집에 돌아와서는 이내 엄마가 보자기에 싸놓은 차례지낸 음식을 손에 들고, 쌀자루인 것 같은 자루를 등에 지고, ‘갔다 오겠다.’ 하고는 집을 나서는 걸 보아온 것이다. 그때 다 저녁때 돌아와서는 엄마와 둘이 ‘삭쟁이고모’ 라는 말이 들어있는 대화를 얼핏얼핏 들었었다.

삭쟁이는 집에서 20여리 떨어져 있는 두메마을이다. 나무가 울창한 큰 재를 두 개나 넘어야 된다. 20여 호 마을 한복판에 있는 대고모 집에 들어서니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반 흰머리 할머니가 마루에서 뛰어내려오며 반긴다.

“아니, 얘가 누구여. 우리 친정집 장손여?”

“예, 인제 학교 들어갔으니 고모님과 안사돈마님께 세배 드려야지요. 그래서 데리고 왔습니다. 사돈마님 방에 계시지요?”

“그럼, 어여 방으로 들어가 뵈어!”

방에 들어가니 파파 할머니가 아랫목에서 주섬주섬 일어나 앉는다. 얼굴이 주름투성이고 몸뚱어리가 앙상하다.

“사돈마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세배 드리러 왔습니다.”

아버지가 소리를 크게 하는 걸로 보아 귀가 어두우신 모양이었다.

“아이고 또 오셨네. 근데 이 도령은 누구요?”

“제 자식입니다 올부터는 같이 오기로 했습니다. 얘야, 세배 드리자!”

“아이구 골골하는 아랫묵차지한테 절하믄 빨리 죽으라는 거라는디 관둬유 관둬.”

그러면서도 자리를 움찔움찔 고쳐 앉는다.

“그래두 근력은 여전하시지요?”

“워쩐걸유, 기운이 날로 떨어지구 게다가 지난 여름부텀 갑자기 귀가 더 어두워지구 눈도 침침해진 것이 산 송장이지유. 환갑진갑 다 지난 며느리(고모)가 그런 이 늙은이 수발드느라 애 많이 쓰지유.”

세배를 마치고 나오니 마루에서 대고모할머니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고종사촌)하구 형수님이 안 보이네요?”

“며느리 친정어머님한테 갔어. 그 사돈마님두 지난 갈에 쓰러지셔서 이번 설 명절에 겸사겸사해서 거기 들 간 거야.”

“형님 처가댁도 그 장모되는 양반 혼자시라고 했지요?”

“그려, 그러니 수시로 들러야 하고 오늘 같은 명절엔 더구나 안 들릴 수 없잖여”

“고모님은 여기 노 사돈마님 구완만 하시지 며느리 수발은 잘 받지도 못하시겠네요?”

“그래도 나는 어머님 한 분만 모시면 되지만 에미는 여기 두 시어른 모시랴 친정어머니 보살피랴 얼마나 신경이 쓰이겄어. 그래서 내가, ‘여기 시할머니는 내 혼자 모셔두 괜찮으니께 니는 친정어머니한테나 신경쓰라구 했지. 그래서 오늘두 차례 지내자마자 지들 두 내우 보낸 게야. 그나저나 오늘 우리 장손이가 모처럼 왔는데 뭘 어떻게 해줘야 할까?”

대고모할머닌 나를 다시 얼싸안아보곤 부엌으로 내달아 명절음식을 상에 올려 내온다. 하지만 떡국 두 그릇에 위아래를 칼로 저민 사과와 배 하나씩 하며 지짐이 한 접시가 전부다. 그러면서 대고모할머니는,

“우리 장손이 먹을 게 부실해서 어쩌지.”

하며 미안해하고 안 됐어 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거였다. 이에 아버진,

“고모, 그런 소리 하지 마셔요. 그나저나 집에서 떡국도 먹고 과일도 다 먹고 왔는데 뭘 이리 차려내느라고 그래요.”

“그야 알제 알어, 그래도 우리 장손이가 왔는데….”

그래도 사뭇 서운해 하는 표정이다. 그런데 그날 돌아오려고 삽짝을 나서려는데 대고모할머닌 내 아랫주머니에 무엇을 쑥 집어넣으신다.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아까 세배할 때 줘야 하는디….”

퍽 안쓰러운 얼굴을 하신다. 오면서 꺼내보니 몇 번이나 꼬깃꼬깃 접힌 천 원짜리 한 장이었다. 세뱃돈이라면 아버지와 동네어른들한테서 받은 게 한 만 오천 원은 된다. 하지만 엄마가 두었다 나중에 준다며 빼앗았다. 그러니 눈이 번했다. 아버지 눈치를 살피니 쓴웃음을 지으며,

“엄마한테 말 안 할 테니 니 맘대로 써두 돼. 그렇지만 긴요한 데 써야 한다. 대고모할머니가 특별히 주신 거 아니냐.”

했다. 이후 아버진 추석엔 혼자 대고모할머니한테 다녀왔다. 이때도 꼭 명절음식이며 두어 말은 됨직한 쌀자루를 짊어지고 갔다. 하지만 설엔 꼭 나를 데리고 갔다. 그럴 때마다 대고모할머닌 꼭 돌아올 땐 그 꼬깃꼬깃한 천 원짜릴 아랫주머니에 넣어주셨다. 이에 재미가 들려 설이 아니라도 일 년에 두어 번씩 아버지 엄마 몰래 대고모네를 들렀다. 그럴 때마다 그 천 원짜린 어김없이 들어왔다. 그런데 중학교 입학을 앞둔 설에 아버지와 세배하러 갔는데 대고모할머닌 뜻밖의 큰 선물을 내게 주셨다. 볼펜 한 갑과 공책 열권이었다. 이걸 파란 보자기에 예쁘게 싸서 건네주면서,

“우리 장손이 공부 열심히 해서 우리 집안 기둥 돼야지. 설빔은 옷 한 벌을 새 것으루 해줘야 하는디….”

또 말끝을 잇지 못하신다. 집에 돌아와 그 보자기를 풀었다. 그리고 공책을 책꽂이에 정리하려고 들었는데 뭐가 펄렁 떨어진다. 야, 돈이다 돈! 천 원짜리 한 장이었다. 이 천 원짜리는 이 후로도 해마다 설날 세배 가면 주시는데, 엄마한테 뺏기지 않고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긴요한 자금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입학하던 해 설날, 나는 대고모할머니로부터 설빔조로 긴 팔 달린 알록알록한 셔츠를 받는다. 그걸 주시면서,

“어림쳐서 장날에 샀는데 맞을라나 모르겄네. 우리 장손이 화사하게 인물 살으라고.”

집에 와서 입어 보는데 주머니에 천 원짜리 한 장이 들어있었다. 이후부터 나는 대고모할머니 댁을 일 년에 두 번씩 혼자 다녔다.

“고등학생이니 이제 이 아버지 대신으로 니 혼자 다녀라. 갈에 추수 끝나면 쌀 두어 말 갔다 드리고 설엔 세배하러 가면 된다. 그런데 말이다 대고모할머니 댁에 가면 인사 여쭙고 얼른 와야지 미적미적 있다가 끼니 축내면 안 되어 알겠제?”

이래서 난 쌀자루를 갔다 드리거나 세배가 끝나면 얼른 일어섰는데 삽짝을 나올 때는 꼭 내 주머니에 천 원짜리 한 장씩을 우격다짐으로 넣어 주는 건 잊지 않으셨다. 이때부터 나는 그 천 원짜리를 하나도 쓰지 않았다. 괜히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3년 동안 모은 게 6천원이다. 이걸 나만 아는 책갈피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는 해 설날, 대고모할머닌 내게 설빔이라며 하얀 와이셔츠 든 곽을 주셨다. 참으로 감개한 일이다. 생전 처음 대하는 와이셔츠였다. 그때 옆에 있던 대고모할머니 며느리(마땅한 칭호를 모른다)가 바짝 다가와 슬며시 귀띔을 해준다. ‘이걸 장만하실려고 지난 여름내 고추 품을 파셨어.’ 하는 거였다. 나는 이걸 엄마아버지가 사준 양복에 받쳐 입고 아주 특별한 날에나 입는다. 또한 역시 그 와이셔츠 주머니에서도 천 원짜리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그때까지 대고모할머니한테 받은 세뱃돈을 어림쳐보았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도합 12년이다. 그리고 설날 이외의 것도 있다. 그렇다면 도합 한 2만여 원은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간직하고 있는 건 6천원이다. 이걸 마련해 주시느라 당신은 얼마나 노심초사하셨을까. 아버지와 내가 날라다 드린 쌀자루 하며, 아버지가, ‘거기 가선 한 끼니라도 축내지 마라!’ 하던 말씀을 생각한다면 정말로 이건 큰 액수가 아닐 수 없다. 그도 그렇지만 집안의 장손이라며 끔찍이도 나를 위하고 사랑해주신 대고모할머니다.

나는 그 후 집을 떠나 대처에 나가 대학을 다니느라 그리고 군대 갔다 오고 취직하랴 해서 그간 한 번도 대고모할머니를 뵙지 못했다. 그 사이, 장병으로 해서 20여 년이나 간병하며 시어머니를 모셨다 해서 효부상도 타셨다 하고, 당신의 그 시어머니도 이제 돌아가시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반가운 일은, “고모님 외아들 그러니까 아버지 고종사춘형님 말이다 그 형님이 열심히 해서 이제 집안이 좀 폈다는구나!” 하는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그런데 그 대고모할머닌 아직 정정은 하지만 연세가 86세란다. 그렇다면 극노인이다. 나는 고이 간직해두었던 책갈피의 6천원을 찾았다. 대고모할머니의 인자한 얼굴이 어른거린다.

“ 이번에 타는 첫 월급은 아버지 엄마 내복 한 벌씩 사 드리고 제 맘대로 쓸 게요!”

“그러려 무나, 그런데 첫 월급으론 전에는 어른들께 빨간 내복을 해줬단다.”

나는 이를 참고해서 첫 월급으로 부모님들 것과는 별도로 대고모할머니의 설빔을 따로 챙겼다. 빨간 내복 한 벌을 비롯해서 노인용 털 코트, 털실로 짠 모자, 털 달린 실장갑, 털 두른 가벼운 신발 그리고 30만원의 현금봉투 이러한 것들을 준비한 것이다.

마침내 설날, 나는 대고모할머니께서 설빔으로 해준 그 하얀 와이셔츠를 받쳐 입은 정장으로 집에서 차례와 세배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대고모할머니께 세배를 드리고자 그 설빔의 보따리를 챙겨 들고였다.

“삭쟁이 가는 길 벌써 포장했어. 짐도 많은데 걸어갈려는겨. 차 가지고 가!”

“괜찮어요. 전에 같이 걸어가고 싶어요.”

만감이 머릿속을 넘나든다. 거기까지 가자면 후미진 재를 둘이나 넘어야 한다. 하지만 쌀자루를 짊어지고 명절음식을 손에 들고 걸었던 길 아닌가!

허위허위 인제 하나를 넘고 마침내 두 번째 재에 올랐다. 저 아래로 삭쟁이 마을이 보인다. 그 가운뎃집에 대고모할머니가 계실 것이다. 얼마나 더 늙으셨을까? 그래도 나를 첫눈에 알아보실 것이다. 그리고 얼싸안으시겠지. 오늘도 그 천 원짜리 한 장을 주실 것인가. 안 주면 달라고 해야지!

 

박희팔 (소설가·동양일보 논설위원)

- 교육신보 공모 1회 전국 학예술상 소설 당선

- 뒷목문학회 회장 역임

- 한국문협 서사문학연구위원

- 청주예술상, 청주문학상 수상

- 콩트집 ‘시간관계상 생략’, 자편소설 ‘동천이’ 등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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