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뉴스
UPDATED. 2018-09-20 23:43 (목)
조선통치비화(16) / 신정新政 취지에 대한 선전과 시설
조선통치비화(16) / 신정新政 취지에 대한 선전과 시설
  • 동양일보
  • 승인 2018.02.18 18: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총독부에 대한 미국의 역선전 방지에 고심”
이충호 필자

● 미국의 역선전에 대한 대책

그리고 세계 각 국(諸外國)에 대한 선전, 특히 미국이 우리 총독부 시정에 대해서 역선전을 하지 못하도록 방지함으로써 진실한 조선 시정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상당히 고심했습니다. 아마 다른 분께서도 조선의 선교사에 관한 이야기는 하실 것으로 생각되므로 그와 관련성이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조선에 와 있는 선교사 중에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부류에 해당하는 분들은 덕망이 높고, 신앙심 또한 두터운 분들로 참으로 정성을 다해서 조선 민중을 지도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스파이와 같은 일을 하거나, 또 외국과 통신을 하는 일을 맡고 있는 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는 극단적으로 총독부 시정에 대해서는 반감을 품으면서, 조선인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동정심을 가진 자도 있습니다. 이런 자들 때문에 사실과 상이한 보도가 자주 외국에 전해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일본의 조선 통치에 대한 오해하는 예가 적지도 않았습니다. 때문에 상해·만주·시베리아 그 외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독립운동에 대해서 외국인, 특히 미국인들이 비교적 동정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렇게 세계 각 국으로부터 동정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조선인들이 자주 경거망동을 일삼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 근원을 근절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이렇게 허위나 악의로 조작된 보고에 의해 현혹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실의 진상을 증명하여 오해를 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특히 미국인들에 대해서는 신속하게 어떤 조치를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선 적당한 인재를 그곳에 파견해야 되겠다고 생각되어 제일 먼저 미국에 파견된 사람이 야마모토타다요시(山本忠美)씨였습니다. 야마모토군은 조합교회 목사로 일했던 분이었습니다. 전문적으로 너무나 알려진 운동가를 파견하는 것이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을 뿐 아니라, 또 야마모토군이 조합교회 목사로서 미국인들에게도 상당한 이해가 있었던 관계로 그를 파견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표면상으로는 미국의 종교생활을 실제로 수련하러 왔다는 것을 명분으로 하고, 이면으로는 조선의 새로운 총독 통치의 실상을 미국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활동하였습니다. 특히 총독 총감의 훈시·유고(訓示·論告), 그 후의 제반제도 및 시설의 실제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습니다.

야마모토타다요시씨는 부인을 동반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처음에는 자신이 문장을 만들어 직접 연설이나 운동을 하며 순회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해외 선전용 활동사진이 완성되었으므로 야마모토씨는 영어로된 활동사진을 휴대하고 각지를 순회하며, 조선이 실제로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미국인을 계몽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꽤 많은 효과를 올렸던 것 같습니다.

이 이외에도 우리 정부가 미국에 대해 강구했던 대책은 상당수가 있습니다. 특히 1920~1921(大正 9,10)년 경에는 시라가미(白上)씨나 지바(千葉)씨 같은 총독부 저명인사들이 미국으로 건너 가 상당히 이 방면의 활동을 열심히 해 주었습니다. 더욱이 선우갑(鮮于甲)씨 등도 이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또 신문기자로서는 가와가미(川上淸)씨에게 의뢰하여 조선통치에 관한 저서를 내게 하기도 했습니다. 또 미국에 현재 살고 있는 선교사들 중에서 일찍부터 일본에 체재하여 그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큐리크박사의 이해와 후원을 얻기 위해서도 상당히 노력을 했습니다.

총독과 총감부임 직후에 신정의 취지를 선전하기 위해 실행했던 일들은 대략 이상과 같습니다. 1920~1922(大正 9,10,11)년이 되면 이러한 일들도 발전하여 변하게 되는데, 이에 관한 자세한 실정은 따로 기회가 있으면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1919년 사이코 마코토 총독과 미즈노 랜타로 정무총감이 조선에 취임하면서 독립운동가(1855~1920)선생의 폭탄 세례를 받아야 했다. 사진은 당시 남대문역 현장 약도(왼쪽)과 사건을 보도한 매일신보 1919년 9월 10일자.

● 희생자에 대한 조위(弔尉) 및 위문

부임이 임박하여 가장 고심했던 것은 인사문제였고, 특히 노구치준키치(野口淳吉)경무국장의 서거에 따른 인사이동의 고충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노구치준키치씨가 부임 도중 병에 걸려 서궁(西宮)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 후 병이 급격히 악화되어 9월 3일에는 노국치국장이 위독하다는 전보가 날아 들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특별히 수속을 취하여 종4위훈 4등(從四位勳 四等)의 서위서훈(敍位敍勳)을 탈 수 있는 길을 강구했습니다만, 그는 그만 5월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다가 경성에서는 부임하자마자 폭탄세례(강우규 의거)를 받아 매우 혼잡한 때였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장례는 정중히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총독부에서는 6일 고바야시 (小林)사무관을 고오베(神戶)에 특파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장례준비에 유감이 없도록 만전을 기했고, 10일 드디어 노구치국장의 장례식이 청산제장(靑山齊場)에서 거행되게 되었기 때문에 9일자로 총독과 정무총감이 정중히 조사(弔詞)를 보냈고, 향과 꽃을 바쳤습니다. 노구치국장이 비장한 뜻과 각오를 품고, 조선에 오려 했으나 중도에 쓰러지게 되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었지만, 이 정중한 대우에 대해서는 유족 일동도 매우 만족해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경무국장직을 보완하고 내무국장을 인선함에 있어서는 몇 차례의 회의를 거쳐 심사숙고한 끝에 총감의 의견을 좇아 당시 대만에 있던 가와사키타쿠키치(川崎卓吉)군으로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기꺼이 승낙했으나, 결국은 오츠카 참사관이 내무국장으로, 아카이케(赤池)씨가 경무국장으로 결정됨으로써 총독부 각 부 부장의 선임을 끝내게 되었습니다.

또한 남대문 역 앞에서 폭탄에 의해 부상당한 사람들의 사후처리에 대해 한 마디 부언하고자 합니다. 폭탄사건의 결과 부상당한 사람들 중 중상을 입었던 사람들은 앞서 말씀드린 바대로 육군군사령부의 소속 무라다(村田) 소장, 구보(久保) 만선 이사(滿鐵 理事), 미국인 해리슨부인, 구도(工藤) 조선신문 사원, 다케이(竹井) 경성일보 사원, 다치바나(橘) 오사카(大阪) 아사히(朝日)신문특파원, 야마구치(山口) 오사카마이니치(大阪每日)신문 특파원, 혼마치(本町)서장 고무다(小牟田)경시 등이었습니다. 이들 모두는 조선통치를 위해 생각지도 않은 상해를 입게 된 사람들로 이들에 대해서는 상당한 위로의 방안을 강구하도록 하라는 총독과 정부총감의 배려도 있었기 때문에, 우선 그 뜻을 받들어 당일부터 다음 날에 걸쳐 비서관이 사상자들을 위문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 경기도 경시가 얼마 안 있어 사망했고,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신문의 다치바나씨도 뒤를 이어 사망했습니다. 오사카 마이니치(大阪每日)신문의 야마구치군도 일시적으로 병상이 매우 험악하다 하여 총독과 정무총감이 아주 가슴 아파했습니다. 폭탄사건으로 인해 불행하게도 사망한 자에게 총독과 정무총감은 조위금을 보냈고, 또 부상자에 대해서는 위문을 하셨습니다. 오사카 매일(大阪每日)의 야마구치군은 겨우 죽음은 면할 수 있었으나, 거의 반신불수가 되어 더 이상 근무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사에서도 야마구치씨를 직무상 부상당한 자로 인정하여 상당한 수당을 각출했지만, 그것만으로 일가의 충분한 생활을 보장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후 총독과 정무총감이 생활비를 보조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야마구치군은 이 부상이 원인이 되어 결국 수 년 후 사망했는데, 총독은 그 미망인에 대해서도 정성껏 보살펴 주셨습니다.

 

● 한해(旱害) 궁민(窮民)의 구제

1919년 조선의 서북지방의 한해는 그 피해가 매우 격심했습니다. 이 때문에 아사(餓死)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 이에 대한 구제를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임 후 곧, 9월 9일에 총독부내에 한해궁민구제위원회(旱害窮民救濟委員會)를 조직했고, 미즈노총감이 회장직을 맡아 그 선후대책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총독부 『시정년보』에 나와 있으므로 이를 생략하겠습니다.

화제를 바꾸어 1920년의 예산편성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먼저 9월 13일 오후 1시부터 국부장 회의를 열어 예산 편성에 관한 대략적인 방침을 토의했습니다. 예산편성에 관한 건은 9월 30일에까지 계속해서 조사 연구가 거듭되었고, 이것이 완성된 것은 11월 3일이었습니다. 이 예산은 종래의 예산과 달라 국고보조금 및 공채 액을 증가시킴으로써 예산의 새로운 면을 개척한 셈이므로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미즈노선생의 말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생략하겠습니다. 그 외 조선부임 직후, 실행에 옮긴 일들 중에서 여기서 말씀드려 두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총독과 정무총감이 총독부의 관리, 공리 그리고 경성 내의 실업가, 신문기자, 영사단, 조선귀족 그 이외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서로의 이해를 돈독히 하기 위해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화합을 개최했다는 사실입니다.

공식적인 초대회는 부임하셔서 9월 13일까지 5일간에 걸쳐 있었습니다. 매일매일 너무도 바쁜 스케줄이 연속되었던 탓에 16일에는 미즈노총감의 위장이 나빠져 제3부장 회의에 출석치 못하게 되는 불상사도 생겼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일로 미루어 보아도 그 당시 내외가 얼마나 다사했던가를 상상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외에도 24일에는 비숍월치씨와 테라니씨의 환영회를 개최했고, 25일에 지방선전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초대했으며, 또 27일에는 미국과 조선의 관계자들을 위한 티파티를 거행하여 관저에 135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고, 29일에는 신문기자 초대회를 역시 관저에서 개최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조선에서 조선 내외인사들과 접촉하면서,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주야겸행하여 다대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미즈노 “지방유력자 소집에 대해서는 앞에서 모리야씨가 이야기했지만, 나도 당시 상황을 조금 덧붙여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우리들이 경성에 착임한 것은 1919년 9월 2일이었는데, 당시 조선은 매우 혼란한 상태였고, 조선통치에 대한 불만과 반항의 기운이 전 조선에 팽배해 있었으며, 특히 소위 불온조선인들이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워(1919.4.11.) 조선 내에 선전을 하고 조선통치에 반항하며 독립을 선동하는 기풍이 한창이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총독통치의 새 정책을 일반인들에게 제시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각 도로부터 지방유력자를 경성에 초대하여 새 정책의 취지를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있었기 때문에 각 도지사에게 명하여 각 도로부터 유력자 2~3명씩을 선발 받아 총독부로 소집했습니다. 중추원 회의장에 이들 유지들을 모아 신정의 취지를 설명하게 되었는데, 당시 이들 중에는 반항의 기운이 충만했고, 극히 불온한 분위기였습니다. 예를 들면 야마가타씨가 인도를 예를 들어, ‘영국이 인도인을 통치하는 정책은 그야말로 가혹하다. 그런데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은 그에 비하면 실로 관대하고 자유스러운 편이다.’라고 말하자 모여 있던 사람들 중에는 조선을 인도와 똑같이 보다니 참으로 괘씸한 일이라면 끈질기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또 각 부장들도 제각기 그들이 주관하는 사항에 대해 연설을 했지만, 승복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불온한 기색이 점점 더 심해지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중추원 강연 때에 일동들에게 가능한 한 완곡한 표현을 써가며 간절하게 조선통치에 관한 근본문제로부터 시작하여 합방 당시의 정신과 새 정책의 개요를 설명했습니다. 제 연설을 조용히 듣고 있던 일동들은 만족하는 듯했고, 그 전날의 험악한 분위기와는 달리, 그 날은 봄바람에 얼음이 녹는 듯한 분위기였다고 평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이 회의를 마치고, 총독은 특별히 일동들을 관저에 초대하여 만찬회를 성대히 베풀었고, 거기다가 선물로 탁상시계 하나씩을 주었습니다. 그 후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그 시계를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면, 고향사람들로부터 협박을 받을 우려가 있다고 생각되어 그 시계를 가는 도중에 부셔 버리거나 하수구에 버린 사람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습니다만, 과연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단지 그 만큼 조선 내부가 동요하고 있었고, 불온한 상황이 팽배했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좋은 일화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 보면 지방유력자들을 소집했던 것이 당시는 예기했던 만큼의 효과를 당장은 올릴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 후 조선이 평온을 회복한 후, 이 때 참석했던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때에 당신의 말을 듣고 우리들은 매우 만족했다고 고백하는 자가 상당히 있는 것을 보면 서서히 그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 후 우리들이 이들과 접촉했을 때, 매우 호감을 갖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는 이 일에 대해 일시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결코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충청대로 103 (율량동)
  • 대표전화 : 043)218-7117
  • 팩스 : 043)218-7447,7557
  • 창간 : 1991-12-29
  • 제보전화 : 043)218-722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원중
  • 명칭 : 동양일보
  • 제호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 등록번호 : 충북 가 00003
  • 등록일 : 1991-12-27
  • 발행일 : 1991-12-27
  • 회장 : 조철호
  • 발행/인쇄인 : 유영선
  • 편집인 겸 편집국장 : 김영이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18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ynews@dy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