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식 청주연세의원장

  그날 첫 환자는 중학생 쯤 되는 여자 아이였다. 북한군도 무서워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중2병이 있음직한 사춘기 여학생. 엄마는 팔짱을 끼고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고, 머리가 떡이 져 기름이 줄줄 흐르는 여학생은 세상 무서운 것이 없다는 듯이 심드렁했다. ‘오늘도 진료 운이 없으려나 보다’라고 생각하는데.


 “선생님, 어떡해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얘가 머리카락을 그렇게 뽑아요. 그러다가 이것 보세요. 이렇게 됐어요. 얘, 빨리 보여드려.”


  싸늘한 엄마의 말에 아이가 무성의하게 내 쪽으로 고개를 숙여 정수리를 내보였다. 정수리를 중심으로 모발밀도가 듬성듬성해 두피가 훤히 보였다. 직경이 10Cm는 족히 넘을 것 같았다. 진료실 천장 불빛이 두피에 반사되어 탈모 부위가 허옇고, 병세가 심각해 보였다.


“아 글쎄 손톱도 다 물어뜯어 망가뜨리더니, 언젠가 부터는 책상에 앉기만 하면 머리카락을 하나씩 하나씩 뽑아요. 두피도 피가 나도록 죄다 뜯구요. 딱쟁이가 가득한 것 좀 보세요.”


  진단명은 인공성 탈모 혹은 견인성 탈모다. 이런 경우 탈모가 심할수록, 그리고 엄마의 얼굴이 창백할수록, 아이러니 하게도 아이의 얼굴은 왜 그리 태연한지. 마치 다른 사람이 걸린 병인 것처럼, 사춘기 여학생은 도통 관심이 없다. 가끔씩 이런 두 모녀가 진료실에 와 있는 비슷한 풍경을 대할 때마다, 꿈에서 본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데쟈뷰(deja vu)가 느껴지기도 한다. 


  요즘 중-고등학교 청소년들을 보면, 공부하느라 스트레스가 참 많다. 스트레스 쌓일 일은 많은데 해소할 방법이 없다 보니, 그 분출구가 엉뚱한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방정맞게 다리를 떨거나, 피가 날 정도로 손톱을 물어뜯거나 하는 일은 예사이고, 심지어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하나씩 잡아당겨 뽑아버리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필자의 병원에서도 스트레스와 관련된 탈모 증상으로 내원하는 청소년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거나 해서 특정부위 모발의 밀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어 두피가 훤히 보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처음엔 빠진 모발이 잘 회복되지만, 반복해서 모발을 잡아당기고 뽑다보면 모낭에 흉터조직이 생겨 회복이 어렵게 된다.

 

  내 자녀에게서 이런 증상이 보이면, 하지 말라고 아이를 혼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이 심드렁하고 태연해 보여도, 대부분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스트레스나 정서적인 부분과 결부되어, 머리털을 뽑는 것을 긴장 해소의 수단으로 사용하다 보면, 스스로 행동을 억제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사춘기 아이들의 인공성 탈모를 호전시키기 위해서는 몇 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 첫째, 병원을 빨리 내원해 치료를 조기에 시작해야 한다. 치료 시기가 늦어지면, 탈모 부위에 섬유조직 혹은 흉터가 생기면서 영구탈모로 이어질 수 있다. 병원에서는 탈모 부위의 섬유조직을 막거나 완화시키기 위해 주사 요법을 시행한다. 그리고 집에서 매일 바르는 물약이나 연고도 흉터조직으로의 변화를 억제할 수 있다. 둘째, 연고를 바르거나 올바른 샴푸법 등을 병원에서 가르쳐 주면, 아이 스스로 관리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스스로 관리하는 습관은 잘 못된 행동을 대체하는, 일종의 인지행동요법이 될 수도 있어 도움이 된다. 셋째, 아이를 따뜻하게 포용해 주고 자기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운동이나 취미를 개발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사랑하는 내 아이가 자존감을 갖도록 한 가지라도 더 칭찬해 주도록 노력해보는 것을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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