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 상수도사업본부 시설과 주무관 김지예

(동양일보) 민족 대명절 설을 맞아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막중한 며느리의 임무를 띠고 시댁으로 2박 3일간 ‘장기 출장’을 갔다. 명절 음식 준비, 삼시세끼 식사 준비와 설거지는 기본 업무이며, 아이들 챙기기와 술상 보기는 부가 업무이다. 설날 당일 제기 닦기, 진수부터 점심식사 완료 후 설거지까지 며느리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다 집으로 복귀했다.

명절 준비를 위한 다양한 종류의 음식 준비, 친척들의 식사 대접으로 여자들만 쉴 틈 없는 명절 문화 때문에 대한민국 며느리들은 명절의 시댁 방문이 특히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나의 시어머니는 평생 사회생활을 해보신 분이라서 직장인 며느리를 위해 명절 준비 시 많은 배려를 해주신다. 아마도 나는 꽤나 편안한 명절을 보내는 운 좋은 며느리 대열에 들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와는 다르게 명절의 시댁 방문은 유독 발길이 무겁다.

이번 명절에도 녹두전부터 막전까지 7종류 전 부치기 임무를 완수하고, 느끼한 기름 냄새를 진한 블랙커피 2잔으로 견디고 있었다. 그때 아이가 한 흑백사진을 들고 오며, 이게 뭐냐고 묻는다.
그것은 시어머니의 꽃다운 스물두 살 때의 사진과 시부모님의 결혼사진이었다. 지금의 나보다도 젊었던 시어머니는 앳되고, 예뻤다. 결혼 사진은 촌스럽지만, 행복해보였다. 순간, 시어머니도 예쁘고 날씬했던 젊은 시절이 있었던 여자이구나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동안 나는‘시’어머니라는 역할에 의해 남편의 어머니와 관계를 맺어왔었던 것 같다. ‘시’어머니가 잘해주시면 잠깐 고맙고, 서운한 일이 있으면 ‘시’자가 들어가서 그런가 보다 하며 많이 서운했다. 세상을 살면서 시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기혼 여성들의 아이스브레이커가 되는 소재라서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사진 속의 시어머니를 보며 아이에게 시어머니의 삶을 이야기 해준다.
“할머니는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셨어. 엄마·아빠가 자꾸 아들은 좋은 음식을 주고, 자기한테는 못생긴 것만 주셔서 싫으셨대. 지금도 남긴 음식을 제일 싫어하셔.”

“꿈은 마당 있는 집에서 화단을 가꾸며, 남편의 사랑받고 아이들을 키우시는 거였대. 가난한 집의 할아버지를 만나서 아픈 할머니를 약도 사드리고 돌보셨어. 그러다가 고모랑 아빠를 낳아서 키우셨고, 돈을 벌기 위해 장사도 하셨어.”
아이는 신기한 듯 나의 이야기를 듣는다.

사진 속의 고왔던 아가씨는 가난한 살림에 세 아이를 키우며 억척스러운 주부에서 할머니로 변해갔다. 시장을 돌며 최저 가격의 먹거리를 구입하셨고, 작은 장사를 하며 살림을 이끌어 나갔다.

두 아이의 엄마가 돼 나이 40을 목전에 둔 지금의 나도 시어머니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최저가로 물건을 사기 위해 인터넷 상점을 서핑한다. 급한 일이 아니면 택시 대신 버스를 이용하고, 내 물건은 두세 번 고민하고 산다.
엄마로서, 주부로서 30년 차이가 나는 시어머니와 나의 삶은 어쩌면 이리도 같을까? 시어머니의 흑백사진을 보며, 내 안에 ‘시’어머니가 아니라 ‘시 엄마’가 들어왔음을 느낀다.

오늘 저녁에는 시 엄마께서 나를 위해 만드신 도라지무침을 반찬으로 따뜻한 밥 한 끼를 먹는다. 오늘 하루는 어떠셨는지 안부 전화도 하고, 세상살이 투정도 해야겠다. 시 엄마의 정 묻은 잔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게 느껴진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