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정지용 시인이 사회주의자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에 대한 환상의 끈을 놓지 못한 흔적들이 있다. 그것은 1945년 12월 13일 창립된 조선문학가동맹에서 아동분과위원장을 맡았었다든가, 경향신문 주필시절에는 ‘인민’, ‘유물사관’등의 용어를 사설에 올리며 좌경문인들과 다시 가깝게 지냈다던가, 1948년 9월 12일 독립신문에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지지발언을 실은 사실 등이 그것이다. 또한 카프의 서기장이었던 임화도 실상 정지용의 경향문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지용과 임화의 시를 읽어보기로 한다. 정지용은 교토의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9년 귀국한다. 1923년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유학을 떠났으니 6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한시에 기본 소양을 가지고 있던 그는 당시 일본 문단을 풍미했던 모더니즘 문학을 통류하며 일본 문단에서 기성 시인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이는 한시가 가지는 회화성과 모더니즘이 중시하는 이미지가 맥을 같이 하는 부분들을 쉽게 운용할 수 있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특히 1927년에는 50편이 넘는 시를 발표하는 시적 역량은 과시하기에 이른다.

임화는 1929년 7월 영화공부를 위해 도쿄로 건너간다. 1931년 봄에 귀국하였으니 그의 일본 체류는 3년에서 서너 달이 모자란다. 도쿄와 교토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일본 유학생들은 문예지를 통해 문학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들이 소통되며 공유되고 있었다.

당시 정지용 시인은 떠오르는 별이었다. 일본 문단뿐만 아니라 일본 유학생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일본에 첫발을 내딛는 임화도 지용에 매료되는데 있어 예외는 아니었다. 정지용이 그랬듯이 1929년 그가 처음 일본에 발을 들여 놓은 후 관심을 보인 것은 ‘지구와 박테리아’와 같은 다다이즘풍의 시였다. 그리고 바로 그해에 지용의 시 ‘카페프란스’의 영향을 받은 ‘우산 받은 요코하마의 부두’를 발표한다. 그의 문학은 곧바로 계급주의 경향으로 이어졌으며 단편 서사시 ‘우리 오빠와 화로’로 KAPF 내부에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북만의 ‘무산자’사에 근무하면서 KAPF의 도쿄지부를 중심으로 볼세비키의 깃발을 들기 시작하였다.

“항구의 계집애야! 異國의 계집애야! / ‘독크’를 뛰어오지 말아라 ‘독크’는 비에 젖었고 / 내 가슴은 떠나가는 서러움과 내어기는 분함에 불이 타는데 / 오오 사랑하는 항구 ‘요코하마’의 계집애야! / ‘독크’를 뛰어오지 말아라 난간은 비에 젖어 있다 // ‘그나마다 天氣가 좋은 날이었더라면?’.../ 아니다 아니다 그것은 소용없는 너만의 불쌍한 말이다./ 너의 나라는 비가 와서 이 ‘독크’가 떠나가거나 / 불쌍한 네가 울고 울어서 좁다란 목이 미어지거나 / 異國의 반역 청년인 나를 머물러두지 않으리라 / 불쌍한 항구의 계집애야 ? 울지도 말아라”

임하의 시 ‘우산 받은 요코하마의 부두’ 전반부이다. 이 시는“이국계집애”인 일본 여공과 식민지 청년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비애가 등가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시적화자는 이국 노동자와 연대하고 있는 식민 현실에 아파하는 청년이다.“너는 이국의 계집애 나는 식민지의 사나이”는 일반적인 프롤레타리아 의식이 식민지 청년의 구체적인 실향민 정서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일본에 유학 오자마자 이러한 문학적 형식과 사상에 빠져든 것은 정지용 시인에게서 영향 받았음을 ‘카페프란스’ 후반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들은 공히 혁명적 이상과 식민 지식인의 현실이 너무나 다르므로 비탄에 빠져든다.

“나는 자작 (子爵 )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 /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 /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 /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 // 오오 , 이국종 강아지야 / 내 발을 빨아다오 . / 내 발을 빨아다오 .” 정지용의 시 ‘카페프란스’ 후반부이다.

종려나무와 앵무새 등의 이국적 분위기의 카페에서 아가씨가 졸고 있다. 시적화자는 여급을 “이국종 강아지”로 부르며 자신의 발을 빨아달라며 비탄에 빠진다. ‘나라도 집도 없는’, ‘ 손이 희어서 슬픈’ 무능한 식민 청년은 바로 볼세비키의 비판의 대상이기도 한 존재이다. 1917년 10월 24일 노동자, 농민의 프롤레타리아 세력이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킨다. 위 시에서의 ‘백수(白手)의 탄식은 당시 유행했던 “반 노동자”의 상징이다. 이 탄식은 곧바로 식민 청년의 비애와도 등가적으로 연결된다.

임화는 1931년 귀국하여 안막, 권한, 김남천 등과 함께 카프의 주도권을 장악했으며 1932년 서기장에 오른다. 지용은 건국이 되자 좌파로 분류되었다. 그는 사회주의자들을 개종시킨다는 이유로 김기림과 더불어 1949년 6월 결성된 보도연맹에 가하였다. 1949년 말 가입자 수가 30만을 육박하였다. 대한만국정부를 지지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배격 분쇄한다는 강령으로 모인 것이다. 6·25가 발발하자 이들은 북한군의 응징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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