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이 동양일보 상무이사 겸 편집국장

(김영이 동양일보 상무이사 겸 편집국장) 이원종 전 청와대비서실장이 국정원의 청와대 특수활동비 상납에 연루돼 재판에 넘겨졌다. 이 전 실장은 국정원 특활비 및 화이트리스트 사건과 관련, 재판에 넘겨진 박근혜 정부 청와대·국정원 인사 14명중 한명이다.
이 전 실장은 2016년 6~8월 3개월동안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이병호 전 국정원장으로부터 직무수행 및 국정원 현안 관련 편의 제공 등 명목으로 매월 5000만원씩 1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특가법상 뇌물수수)를 받고 있다.
이 전 실장 측 변호인은 “1억5000만원을 받은 건 인정한다”면서도 “국정원 인사에 관여하지 않아 뇌물수수 범의가 없다. 박 전 대통령과 공모했다는 부분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행정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그는 개각 때마다 국무총리나 주요 부처 수장으로 거론돼 왔다. 그의 경륜이 그만큼 화려하고 출중한 능력, 훌륭한 인격을 자타가 인정해서다.
항상 그런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그는 마침내 2016년 5월 박근혜 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발탁돼 많은 충북도민들의 축하를 받았다. 아울러 늦었지만 그런 숨은 보석을 찾아낸 박 전 대통령의 용병술에 모처럼만에 박수를 보냈음은 물론이다.
도민들은 평생을 행정관료로 살아온 이 전 실장이 그런 경험을 살려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국정의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해 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최순실 사건은 그를 나락으로 내쳤다. 이른바 ‘봉건시대’ 발언은 그의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이 전 실장은 2016년 10월21일 열린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대통령 연설문 수정 등 최순실 씨의 국정 개입은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력 부인했다. 비서실장으로서 그의 발언은 진실이었으리라.
충북지사(세차례)와 서울시장 등을 역임했던 그에게 당시 언론에서 제기한 각종 최씨 관련 의혹들은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일임엔 분명했다.
더군다나 최순실씨가 권력 서열 1위라는 항간의 소문을 이 전 실장에게 수긍하고 인정하라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같은 달 25일 박근혜 전 대통령 입을 통해 최씨 관련 의혹은 사실로 확인됐고 이 전 실장은 졸지에 위증혐의까지 받게 됐다. 심지어 그의 봉건시대 발언은 야당의원들로부터 국정 현황파악을 전혀 못하고 청와대에서도 겉도는 비서실장이라는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문고리 3인방의 전횡에 밀려 비서실장 재직 6개월동안 대통령을 두 번 밖에 대면하지 못했다는 언론보도도 나왔다.
서글픈 일이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봉건시대 발언에 수긍이 간다. 지방행정 전문가로 평생을 살아온 그로서는 민간인이 국정 깊숙히 개입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거다. 더욱이 그는 문고리 3인방이라는 인의 장막에 가려진 처지였다.
그를 옥죈 것은 국정원 특활비다.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관행으로 제공된 것이라지만 불법수수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해 불구속 기소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됐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충북지역 원로들을 중심으로 ‘이원종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정작 이 전 실장은 서명운동에 손사레를 쳤다고 한다. 자신으로 인해 도민들이 불편을 겪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란다.
탄원서에는 “사리사욕없이 도정을 수행해 충북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고 후배들에게 존경 받는 정신적인 지주가 됐는데 이런 사건에 연루돼 안타깝다는 것이 지역의 여론”이라며 “충북을 발전시킨 원로로서 청렴한 공직자의 사표로 남을 수 있도록 선처를 간곡히 탄원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장모(63) 씨는 탄원서를 들고 청주와 제천, 단양 등지를 오가며 서명을 받고 있다. 그는 “탄원서를 보여주면 서명을 주저하는 사람이 없다”면서 “재임 8년동안 많은 업적을 남기고 3선 불출마로 아름다운 용퇴를 한 이 전 실장을 아직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며 분위기를 전했다.
탄원서는 충북도청 공무원들의 서명 등 참여가 마무리되면 3월 중순쯤 재판부에 전달될 것으로 보인다.
한 공무원은 “국정원 특활비와 관련해 기소된 14명중 탄원서 준비는 아마 이 전 실장이 유일할 것”이라며 “탄원서가 법적인 효력은 없어도 판결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지는 않겠느냐”고 기대했다. 
이 전 실장은 비서실장을 사퇴한 뒤 한 지인과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비서실장 6개월 동안 한편의 영화를 찍고 내려온 기분이었다.”
국정농단 사건의 ‘몸통’ 격이자 헌정 사상 처음으로 파면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발탁된 이원종 전 충북도지사, 그를 좇는 충북도민에겐 비운의 대통령비서실장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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