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논설위원 / 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신년에 호기 있게 사서 3월에 이르러서야 책 빚을 탕감한 시드니대학 존 킨 교수의 ‘민주주의 삶과 죽음’은 여간해선 읽기가 벅찬 책이었다. 고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2500년이 넘는 방대한 역사를 담다 보니 본문 분량은 천 쪽이 넘는다. 존 킨은 ‘에필로그’에서 자료 조사와 집필에만 무려 10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고 기술했다. 민주주의 역사책이 따로 없다. 존 킨은 지난 1945년 이후 “민주주의 역사에서 한 번도 없었던 규모로, 공공 감시가 모든 정책 영역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라며 이를 ‘파수꾼 민주주의’라고 통칭한다. 지배 권력에 대한 상시적 감시를 기반으로 하는 파수꾼 민주주의는 ‘탈 대의제’ 민주주의의 형태다. 촛불집회가 그 전형이다. 이렇듯 공력을 들인 작가의 책은 시대와 호흡한다.

민주주의는 ‘보편적 지배’를 꿈꾸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우리가 차용하고 있는 대의민주주의는 ‘뜻을 대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누구의 뜻을, 얼마만큼 대신할 것인지가 늘 변수다.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감성적 기대를 품고 있다. 올바른 것은 결국 다수의 지지를 받고, 다수가 원하면 우리의 대의자들이 제도와 권력으로 사회 공공선을 구현해줄 것이라 막연히 기대한다. 그러나 이러한 순진한 기대와 달리, 정당은 사악할 때가 많다. 기존 정당에 실망하는 이들에게 조심스럽게 얘기하자면, 정당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래도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것은 경쟁과 선택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결코 완결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항상 다시 한 번 민주주의가 되어야 하는 그런 것이다. 우리가 매번 정치에 실망하면서도 투표장에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린 그간 투표를 하는 것만으로도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는 자만심에 사로잡히지 않았던지 되돌아보자. 우리가 선출한 이들에 대한 감시와 견제에 소홀했다는 것을 통렬하게 자성해보자. 우린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파수꾼 역할에 충실했는지를 말이다. 우리가 선출한 대의자들이 지난 4년 동안 향후 4년 동안 어떤 일들을 하여 왔고 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지방정치개혁의 시작이다.

대의민주주의 아래서 시민이 바랄 수 있는 최대치는 다양한 정당의 존재와 대의자의 스펙트럼이다. 그래야 선거 때, 이 정당에서 다른 정당으로, 지지했던 후보에서 다른 후보로 내 이익과 기호에 따라 정치적 욕구와 기대를 옮길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는 그런 선거일 때만이 지속 가능하며 유효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대의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정치 소비자의 선택권을 종종 침해한다. 딱히 선택할 이가 없는데도 이 중에서 택하라고 강요하는 협소하고 그릇된 공천이 그것이다. 대의민주주의는 시민의 정치적 의사를 올바르게 재현하지 못할 때 치명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선거 과정에서 시민의 권리를 위임받으려는 이들은 시민의 정치적 의사를 재현하는 정책들을 제시한다. 이 정책은 시민의 권리를 재현한다는 대의자의 공적 약속이며 의무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정당정치에서 공적 계약을 온전하게 지킨 정당이 얼마나 존재했던가? 플라톤은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라 일갈했다. 지난 4년, 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에 대한 심판 도구는 오로지 투표였다. 그러나 이제는 파편화되고 개별화된 유권자가 아닌 집단으로서의 160만시민이 정치에 제도를 마련하자.

지방의회는 포기할 수 없는 민주주의 요체인 자치분권의 근간이다. 그러나 1991년 의원 선거로 부활한 이후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지방의회를 촛불 집회와 같은 파수꾼 민주주의로 바꿀 수 있다고 믿어 보는 일, 우선은 지방선거에 대한 적극적 참여와 관심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위로받아 마땅한 이들이 지역 도처에 차고 넘친다. 이들을 보듬고 위로할 이들을 눈을 부릅뜨고 찾아내는 일, 6월 지방선거 사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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