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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교육개혁과 융합교육(融合敎育)의 관계<한희송>
풍향계-교육개혁과 융합교육(融合敎育)의 관계<한희송>
  • 한희송
  • 승인 2018.03.05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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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작금(昨今) 융합교육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학교의 교과과정에서도 이의 도입에 관한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향의 연구가 다양하게 시도되어지고 있다. 융합교육시스템이 성립되기까지 거쳐야 할 가장 높은 문턱은 이 개념이 지식축적의 방법으로 일반적인 이해의 범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현재 미분(微分)시간에 문제를 푸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행위도 인정할 수 없는 관념구조를 가지고 있다. 만일 미분이란 용어자체를 설명하려면 느닷없이 그것은 한자공부를 한 사람만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미망(迷妄)에 빠지고, 미분이 영어로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은 영어선생님에게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전도된다. 뉴튼(Issac Newton)이나 라이브니츠(Gottfried Leibniz)에 의해 결정적 발전을 이룬 미분개념에 대한 연구는 아무래도 과학분야 같고 17세기 말이라는 시대적 특징이 미분이란 개념을 탄생시키기 위해 수학에서 갖는 의미는 아무래도 세계사와 관련되어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수(數)나 기하학적 도형의 최소한의 크기가 미분의 전제라는 부분에서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철학(pre-Socratic Philosophy)이라는 철학적 분야에서만 다룰 수 있는 문제로 인식한다.

본시 하나의 개념이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하나의 공간이다. 그러나 그것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가 될 수 없다. 공간은 하나지만 이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최소한 두 개 이상이 되어야 한다. 하나의 육면체는 하나의 공간에 위치할 수 있지만 하나의 방향에서 그 육면체 전체를 관찰할 방법은 없다. 그것의 원래 모습 자체를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여러 방면에서 접근해 본 후 이를 관념세계에서 종합해야 한다. 따라서 미분이란 실체가 존재하는 공간은 하나일 뿐인데 이를 바라보는 방향이 수학, 한자, 영어, 역사, 철학 등으로 분화될 뿐이다. 이 때 미분을 이해하려면 이 모든 방향의 접근을 허용해야만 한다. 이 중 하나의 시각으로만 접근하면 미분은 사라지고 기술적 의미의 그 무엇만 남게 된다. 현재의 교육제도가 갖는 한계가 이것이다. 이 시점에서 사람들은 학문의 원래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더욱 좁은 시각으로 학문의 개념에 접근하는 것에 ‘전문성’라는 수식어를 부여하며 이를 독려(督勵)했다. 그 극단이 바로 인격과 인성까지 제거된 기능인으로써의 인간생산이다. ‘전문성’을 높고 깊게 가지면 가질수록 학문은 그 존립의 기저(基底)인 인간성까지도 분리해 내었다. 인격을 가진 인간에서 인격이 제거된 품질이 좋은 기계의 부품으로의 변화를 진화로 인식하는 단계에 이르러 인간이란 단어를 새롭게 정의해야할 시점이 오자 ‘전문성’과 ‘학문’의 본래적 의미를 재고(再考)하자는 의견들이 개진(開陳)되었다. 이것이 바로 융합교육의 근본 개념이다.

어떤 ‘기술’이 단순히 ‘기능’인지 아니면 ‘지식’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것인지에 관한 논쟁은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의 역사의 시대구분에서만 논할 일이 아니다. 그 기술의 습득이 기능을 향상시키기만 하는지 추상적 논리의 발달을 통한 ‘인격’의 고양(高揚)과 관련성을 가지는지의 기준이 지식으로의 편입가능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현재의 제도는 모든 학문을 기술로 격하하는 과정 속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이 측면에서의 반성이 필연적이었고, 그에 대한 숙려(熟慮)가 융합교육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따라서 융합교육은 창의성과 미래성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기술이 지식과 결탁했던 근대의 탄생기로 회귀함을 의미한다. 근현대의 위대한 탄생은 기술과 지식의 융합에서 왔다. 우리나라의 르네상스군주인 세종대왕은 장영실이란 관노(官奴)를 기술이란 측면에서 뛰어난 지식인으로 인식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와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지식인이 아니라는 설정은 오히려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그 위대한 기술자들이 이미 지식인이었던 그 시대를 노동의 분업을 통해 분화해감으로써 지식과 기술을 떼어 놓은 것이 현대이고 그것이 갖는 부정적인 측면이 지금 우리가 교육개혁을 부르짖게 하는 요소들을 만들었다.

융합교육은 교육의 진화가 아니라 퇴화(退化)의 교정이다. 기실(其實), 교육에서 융합이란 말은 없어야 한다. 융합교육이 추진하는 바가 이미 교육 그자체이며 융합되지 못한 교육은 지식과는 관련이 없는 기술교육에 한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현대적 의미는 먹고사는 기술적 문제에 삶에 대한 근본적 고찰이 가능한 지식을 입힘으로써 인격적 인간을 키워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교육개혁이고 그것의 또 다른 표현이 융합교육이어야 한다. 융합교육이란 표현은 이 방향에서만 교육개혁과 관련성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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