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3월 들어 ‘우수(雨水)’가 지나고 엊그제가 ‘경칩(驚蟄)’이다. 전국적으로 봄비가 내리고 강원지역에서는 뒤늦게 폭설이 내리기도 했지만 춥고 지루하던 겨울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꽃샘추위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바람은 차지만 한편으론 ‘대동강 물이 풀리고 개구리가 놀라 깨어나는 시기’임에 틀림없다.

온 대지에 물이 오르고 스멀스멀 봄기운이 느껴지는 이때, 아직은 아니라고 시샘하듯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이 ‘꽃샘바람’이다.

이 시기에 나무들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뿌리를 통해 자양분을 조금씩 빨아들이고, 줄기는 우듬지까지 수액(樹液)을 전달해야 한다. 이른바 산천초목이 생명의 싹을 틔울 채비를 서두르는 때다. 문제는 긴긴 겨울 동안 움츠려 있던 초목들이 꽃샘바람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기지개를 켜고 활동하기가 녹록치 않다는 것이다.

가지에 미련이 남아 떠나지 못했던 낙엽이라든지 겨우내 표피에 쌓여있던 먼지를 말끔히 털어내고 맑고 찬 공기로 나무줄기를 흔들어 줘야 뿌리에게 봄맞이 신호를 보낸다는 것이다.

꽃샘바람의 사명이자 존재이유다.

꽃샘바람이 일견 춥고 변덕스런 날씨로만 알려져 있지만, 알고 보면 ‘바람 한줄기도 허투루 불지 않는다.’는 깊은 자연의 섭리가 녹아 있는 것이다.

꽃샘바람이 아무리 쌀쌀해도 곧 다가올 생명의 봄을 품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기보다 따뜻한 미소가 먼저 떠오르는 것이다.

 

정지용 시인은 <춘설(春雪)>이란 그의 시에서 ‘문 열자 선뜻! / 먼 산이 이마에 차라’ 했고

‘웅숭거리고 살어난 양이/ 아아 끔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 순 돋고/ 옴짓 아니긔던 / 고기입이 오믈거리는’ 봄의 모습을 노래했다.

-얼음이 녹고 파릇파릇 미나리 새순이 돋고, 꼼짝 않던 고기가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이라니,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봄이다. 문 열자 선뜻하니 이마에 찬 ‘꽃샘바람’이야말로 ‘웅숭거리며’ 겨울을 버텨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경이로움이다.

 

요즘 우리사회에 부는 #미투(나도 당했다)가 어쩌면 ‘꽃샘바람’을 닮고 있다.

문화예술계, 연예계, 검찰, 교육계, 정치권 할 것 없이 전방위로 거의 매일같이 드러나는 악습의 껍질과 켜켜이 덮여있던 추악한 만행들, 그리고 아직도 거짓의 뒤안길에 피어 있는 곰팡이 균들이 희망의 ‘봄’을 더디게 하고 있다.

꽃샘바람이 자연의 섭리라면, #MeTo 바람은 새 이(齒)가 나기 전의 아픔처럼, 출산의 고통처럼, 속울음을 삼키며 가하는 ‘사랑의 매’처럼 우리사회에 부는 ‘인륜의 바람’이다.

엄청나게 높은 잣대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의 사람대접과 최소한의 자유의지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고 보호받고 싶은 것이다.

순리대로라면 지금 우리 사회에 부는 이 ‘꽃샘바람’은 더 모질고 매몰차게 불어야 한다.

꽃샘바람에 섞여 한 줄기 훈풍이 불어오기도 한다.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여러 가지 우려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일촉즉발의 긴장을 누그러뜨릴만한 꽃샘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대북특사단이 돌아왔다. 김정은이 비핵화의지를 표명했고, 4월말 정상회담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핫라인도 개설하고 주변국들의 협조와 설득을 통해 실낱같은 한반도의 봄을 기대하고 싶은 것이다.

아직은 모르지만 봄비가 겨울가뭄을 적시며 시나브로 뿌리에 스며들 듯, 현재 겪고 있는 ‘꽃샘바람’이 매서울지라도 위드유(#WithYou- 당신과 함께하겠다)를 응원하고 기다려야 한다. 꽃에서 봄을 찾을 수도 있지만, 꽃샘바람이 부는 까닭을 먼저 살펴야 한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