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이충호 <일본 구마모토국제대 부이사장>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가 2005년 10월 20일, 100년 동안 일본 야스쿠니신사 한 모퉁이에서에서 누워 있다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새롭게 단장해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하고 난 후, 2006년 1월 함경도로 돌려보냈다. 양국 불교계의 적극적인 문화재 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제자리에 돌려진 우리의 문화재이다.
이 비석이 대한항공을 타고 우리나라로 돌아오던 날, 나는 TV 중계를 지켜보면서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
나는 1990년 도쿄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한 구석 비둘기 집 아래 한 모퉁이에서 비둘기의 흰 똥으로 덮여 방치되어 누워 있는 이 비석을 처음 보았다. 최서면씨의 얘기를 듣고서야 이 비석이 북관대첩비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이 비석의 숨겨진 내력에 대해 소상히 조사해 보았다.
‘북관대첩비’의 정식 명칭은 ‘조선국함경도임진의병대첩비(朝鮮國咸鏡道壬辰義兵大捷碑)’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가토 기요마사(加藤 淸正)군에 승전한 것을 기념해 정문부(鄭文孚·1565~1624) 의병장에 의해 1709년 한경북도 길주에 세워졌다.
임진왜란 후 307년간 역사의 산 증인으로 서 있던 이 비석은 1905년 러일전쟁 때 함경도 지방에 출병한 일본군 2예비사단 여단장 이케다 마시스케(池田正介) 소장에 의해 발견돼 일본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러일전쟁을 승리한 이케다 소장은 귀국길에 이 낮선 비석 근처에서 휴식하고 있었는데, 비석의 내용이 그를 놀라게 했다. 300여 년 전 일본과 조선의 싸움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조선 병사들이 왜병을 대파하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케다 소장은 분노를 금치 못하며 이 비석을 배에 싣도록 명했다. 동해 바다에 빠뜨려 역사의 흔적을 없애고자 그 순간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어떠한 연유인지는 몰라도 시모노세키항을 거쳐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됐다. 조선의 전승기념비가 일본인 전몰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야스쿠니 신사에 함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다시 이 비석을 만났을 때는 도쿄한국학교 국사교사로 파견 근무를 하고 있었다. 비석에 대한 조사 내용을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열변을 토하면서 설명했다. 일본에서 살고 있는 우리 학생들에게 항일 의식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학생들에게 탁본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이 비석을 탁본해 제출한 학생에게 국사 점수 20점을 가산해 주기로 약속했는데 큰 일이 일어났다. 먼저 가서 탁본한 학생들은 별 문제가 없었지만, 그 다음에 간 학생들이 관리인에게 쫓겨 도망쳤던 사건이 있었던 것. 혈기 왕성한 고등학교 남학생들 중에서는 리어카를 구해 비석을 실어 한국학교로 옮기겠다는 학생도 있었다. 그 후 관리 사무소로부터 학교에 항의전화가 와서 사과하기도 했다. 학생들이 탁본한 것 중에는 아주 선명하게 잘 탁본된 것도 있어 사료적 가치도 있다.
5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귀국했고, 5년 후 다시 도쿄 근무(도쿄대한민국 대사관)를 하게 되었는데, 본국에서 오시는 분들과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갈 때면 이 비석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2003년 11월 나는 교육인적자원부에서 근무하였는데 업무 차 도쿄에 출장을 가게 되었다. 동행했던 교육과정정책과장(김만곤)을 모시고 나의 추억에 어린 ‘북관대첩비’가 있는 곳을 또다시 찾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비석이 보이지 않았다. 관리 사무실에 가서 “이곳에 있던 ‘북관대첩비’가 어디에 있어요?”하고 물었더니 “‘조선 비석’ 말인가요?”하면서 비석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과거 누워 있던 곳으로부터 200m가량 떨어진 야스쿠니신사 본전 뒤에 있는 유슈칸(遊就館) 쪽에 비각을 세우고, 철책으로 둘러싸서 잘 모셔 놓았던 것. 나는 안도감을 가졌다. 지금도 당시 함께 출장 갔던 김 과장도 그 때의 추억을 이야기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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