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30대가 보는 고령자 / 이해할 것인가, 인정할 것인가

박소예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2018년 2월의 어느 날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는데,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 너머로 큰 말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할아버지 한 분이 기관사에게 연결되는 수화기를 들고 소리치고 계셨다.

“아니 내가 지금 노인네라고 무시하는 거야! 안내 방송도 안 들리고, 전광판도 고장 나서 글자 하나 안 보이면 무슨 수로 내리라는 거야! 노인네는 지하철도 타지 말라는 거야?”

같은 칸에 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했지만, 할아버지는 아랑곳 않고 호통을 치더니 다음 역에서 내리셨다. 할아버지가 내리고 난 뒤에 사람들은 다시 핸드폰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공공장소에서 쉽게 들을 수 없던 큰 소리가 남긴 파장은 여전히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따가웠다. 내 귀를 자극하던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그런 할아버지를 바라보던 내 시선도.

고령화가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사회다. 그런데 지금의 문제는 불과 몇 년 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전의 노인문제는 핵가족화로 인한 노인소외현상, 노인일자리 부족 등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가정과 사회에서 소외되는 그야말로 ‘노인’들이 처한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사회에서 대두되고 있는 문제는 ‘노인과 청년’ 사이의 세대갈등으로부터 출발하는 것들이 많다.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말하고, 대중교통에서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다고 대뜸 호통을 치고, ‘요즘 것들’의 불성실함을 소리 높여 나무라는 노인들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는 글이 인터넷 커뮤니티들에 올라오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다. 더 이상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공경받기를 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장년과 청년 사이의 갈등 또한 문제로 불거지고 있다. 기성세대인 장년층이 직장 내 성희롱,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보수적이고 수직적인 직장문화, 부정부패 등 부조리한 사회문제의 중심으로 여러 언론매체에서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 세대들이 자신들에게 보여주거나 행했던 부조리한 모습들을 그대로 답습한, 혹은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행태나 다름없는 것이다. 어찌 보면 기성세대인 장년층이 노인과 청년을 연결하는 다리로서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인생의 후반부를 정리하고 있는 노인들보다 훨씬 더 큰 문제의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명관의 소설 ‘고령화가족’에 등장하는 가족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시대의 부조리와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의 전형이다. 아니, 부대끼다 못해 소위 ‘막장’이 되어버린 가족이다. 형 오한모는 싸움을 일삼다 중년이 다 되도록 어머니 슬하에서 밥만 축내고, 동생 미연은 바람으로 말미암은 재혼을 두 번 한 사람이다. 자식들을 위해 한평생을 희생한 줄 알았던 어머니는 재취인 자신을 냉대하는 남편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남자와 도망 나와 살림을 차린 적이 있고, 그리하여 세 남매는 아버지, 어머니가 각기 다른 것이었다. 동네 할머니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딱 좋은 집안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한 편의 막장 드라마와도 같은 이 집안 사정을 파산 후 궁지에 내몰려 할 수 없이 어머니의 집에 얹혀살게 된 후에 알게 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주인공은 과거의 기억만으로 가족들을 판단했던 인물이다. 처음에 어머니의 집에 들어갔을 때 그는 가족들의 현재 모습보다는 과거의 모습을 투영시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랬던 주인공이 가족들 각각의 사연을 알게 되면서 그의 생각은 점차 바뀌게 되고, 가족 간의 관계 역시 변화한다. 조카 민경의 가출사건이 가장 결정적인 계기였을 것이다. 민경의 가출은 만성무기력증에 걸려 세상을 비난하기 바빴던 주인공과 오한모를 움직이게 하고, 서로 대화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주인공은 오한모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오한모의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자신도 B급 영화를 찍으며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게 된다. ‘고령화가족’은 이미 고령화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년을 향해 가는 세 사람은 살아 온 몇 십 년 동안 각자의 삶의 방식을 고수해 온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밥을 먹고, 중학생 민경을 진절머리 나게 만들 정도로 부딪히기도 하면서 서로가 가족이었음을 새삼스럽게 받아들인다. 다시 각자의 삶을 찾아가고 다시 뿔뿔이 흩어지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지하철을 탔던 그날로 다시 돌아가 보았다. 할아버지 앞에는 귀가 안 들리는 할아버지께 목소리를 높여 내릴 역을 알려주던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기관사에게 항의를 하는 내내 할아버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계셨다. 할아버지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할아버지를 쏘아보기만 할 뿐 할아버지께 공공장소 예절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던 나와 내 또래 사람들의 모습도 돌아보았다. 그때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생각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맞다. 이해할 수 없다. 공공장소라는 개념이 할아버지 세대에는 당연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만일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확연히 다른 세상을 살아 왔고 아직 그 세상의 규칙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이해하려 한다면 할아버지가 얼마나 귀가 어두운지, 크게 소리를 지를 만큼 급한 상황에 있는지 등등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모두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날 그 지하철의 할아버지와 같은 어른들이 많다. 하나하나 사정을 듣고 이해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주인공이 처음 어머니의 집에 들어가 오한모와 말도 섞으려 하지 않고, 나도 할아버지께 할아버지의 행동이 과했다는 말을 건넬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아마 나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말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대중교통을 탈 때마다 매번 같은 문제로 마음속을 시끄럽게 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인정해보려고 한다. 주인공이 오한모를 지켜보고 난 후 그의 삶의 방식을 인정했던 것처럼, 우리 부모님세대와 그 윗세대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나의 세대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보려고 한다. ‘그래, 그런 사람들이었지.’라는 생각이 자연스러워지고 나면, 어느 날엔가는 살갑게 “좋게 말해주세요, 어르신.”이라고 말을 건넬 수 있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끝으로 자신의 가족을 가지고 말도 안 되는 추측을 하고, 심지어는 자신을 ‘마약쟁이’로 만들어버린 노인들을 바라보며 주인공이 했던 생각을 다시 한 번 되뇌어 본다. 그들에게 각자의 사연을 시시콜콜 설명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들이 우리 집 사정을 알 리도 없을 테고 나에게 일어난 많은 변화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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