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30대가 보는 고령자 / 할머니가 주신 ‘삶의 향기’

서지원 서강대 철학과

스물과 스물하나, 이십대의 첫발을 내딛는 2년을 재수학원에서 보냈다. 재수도, 일주일 만에 대학을 자퇴하고 시작한 삼수도, 모두 내가 선택한 일이었기에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하루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네는 아직 젊어. 그 나이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매일을 사는 거야.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선생님 정도의 나이가 되면 무언가를 ‘잃지 않기 위해’ 사는 것 같아. 내가 가지고 있던 걸 지키는 것조차 쉽지만은 않다. 그러니까 너희가 힘을 쏟을 수 있는 지금, 더 노력하고 더 도전했으면 좋겠다.” 이 말씀을 하시던 선생님의 얼굴엔 수많은 표정들이 스치는 것 같았다.

선생님께서 어떤 의미와 의도로 이야기를 하신 건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했을 뿐이다. 첫째는 ‘우리의 젊음에 대한 응원이기도 하고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자극이기도 하구나.’라는 느낌이었다. 둘째는 의구심이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는 게 정말로 뭔가를 잃어가는 과정일까? 경험도 많아지고 인맥도 넓어지고 연륜이란 것도 생기는데? 그런 건 ‘얻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나이 들어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잖아?’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떠올렸던 의문처럼, 나이가 든다고 뭔가를 꼭 잃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신이 절대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것을 잃어가기도 한다. 그 어떤 사람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였다. 수능이 끝나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을 때, 치매라는 병 때문에 기억을 잃어가는 할머니와 어떻게든 그 기억을 붙잡아보려는 부모님의 모습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은 마치 거역할 수 없는 운명 같은 슬픔처럼 느껴져서 더 슬프고 더 아팠다.

사실은 나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할머니와 부모님과 나는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내가 중학교 때부터 치매 증상을 보이셨다. 처음엔 같은 말을 몇 번씩 하셨고 시계를 잘못 읽는 횟수가 점점 많아지다가 언제부턴가는 매일 몇 번씩 사용하시던 가스레인지 켜는 법조차 잊게 되셨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수년에 걸쳐 보았음에도 애써 모른척하고 말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인정하기 싫어서’였고 ‘알면 힘들 것 같아서’였다. 이렇게 나는 현실을 직시하기까지 몇 년을 돌아왔고 그 사이에 할머니는 너무 많이 변하셨다.

어린 시절의 할머니는 내게 또 한 명의 엄마 같은 존재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처음 일주일 동안은 부모님이 같이 등교해서 2시간 정도 수업을 참관하고 아이와 함께 하교하는 식으로 일과가 진행됐다. 나는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할머니와 함께 학교에 갔다. 교실 뒤쪽에는 몇 분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한 분의 할머니가 서 있었다. 친구들은 ‘저 할머니 누구 할머니야? 너는 왜 할머니가 왔어?’ 묻기도 했지만 나는 전혀 이상하다거나 부끄럽지 않았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할머니가 사주시던 떡볶이나 슬러시도 그립다. 이런 순간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창피함이 아닌 행복한 추억으로 존재한다.

할머니는 좋은 선생님이기도 했다. 내가 일곱 살쯤 되었을 땐 6.25 전쟁 이야기를 해주셨다. 내 또래의 다른 친구들은 책, 영화, 다큐멘터리 등에서 접했을 이야기였다. 나는 할머니의 말씀을 잘 기억했다가 ‘통일 웅변대회’에 참가했다. 직접 쓴 글을 아빠에게 보여드리기도 하고 엄마와 할머니 앞에서 웅변 연습을 해보기도 했다. 내가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글로 써보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발표하고 싶다는 생각 덕분이었다. 할머니는 내게 지식과 기억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도전해보고 싶다는 의지도 함께 주신 것이었다. 할머니에게 실뜨기, 공기놀이, 비석치기를 배울 때도, 만두 빚는 방법이나 호박잎 따는 요령을 배울 때도 비슷했던 것 같다. 내 손과 발이 움직여야 하는 방식과 더불어서 머리와 마음으로 느끼는 재미와 지혜까지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노력, 말, 행동에서 비롯된 것 말고도 나는 할머니를 통해서 많은 경험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아주 어렸던 때부터 지금까지 갖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고민이 그렇다. 여섯 살 무렵, ‘죽음’을 성찰하기엔 어린 나이인 것 같지만 그날의 기억은 아직 선명하다. 어린이집에 갔다가 혼자 집으로 돌아왔는데 대문을 열어도, 현관문을 열어도, 심지어 방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도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어렸던 나는 알 수 없는 막막함과 불안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돌아오셨다. 노인정에서 친구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집에 오는 시간을 깜빡 놓치셨다고 했다.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그저 ‘으앙’하고 울어버렸어도 됐을 것 같다. 그런데 내게 앞섰던 것은 그런 눈물보단 ‘지금 여기에 할머니란 존재가 없다’는 충격이었다. 여기에서 시작하여, ‘없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느끼고 있는 불안감과 어두움에 대해서 고민했다. ‘이렇게 ‘없는’ 느낌이 죽는다는 걸까? 사람은 늙고, 늙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죽는 것은 사라지는 걸까?’ 생각했다. 이러한 질문들은 어쩌면, 내가 나이를 한 살 두 살 더 먹어가는 과정에서 덧붙여진 의미이자 할머니가 안 계시던 그 순간의 감정에 대한 훗날의 해석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황망한 기분으로 여러 개의 문을 열던 어린 나의 모습은 분명 내가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첫 순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와 함께하면서 자연스럽게 받은 선물들이 많다. 나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면 ‘우리 할머니가 저렇게 서 있으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리를 양보하곤 했다. 이건 어쩌면 ‘도덕’에 대한 자연스런 감정이었을 것이다. 할머니를 대하는 부모님의 태도를 보면서는 자연스레 ‘효’를 배웠고, 맛있는 음식을 할 때면 서로 나눠먹어야 기분이 좋다는 동네 할머니들을 보면서 이웃사촌의 ‘정’이 뭔지 알았다. 이런 자연스런 배움과 느낌들이 하나하나 선물처럼 쌓여가며 나의 지혜 또는 성품 등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이 같은 ‘편안한 깨달음’이 가능했던 이유는 동네 할머니들과 나의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 중 누구도 나에게 ‘넌 우리에게서 이걸 배워야 해’ 혹은 ‘나는 지금 너에게 이걸 가르치고 있어’라고 강요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경험이 많은 어른들이 아직 어린 젊은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발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억지로, 일방적으로 이뤄질 경우 반발감이나 거리감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부작용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아하는 어른들의 실수는 줄여야 하는 부분이다. 한편에선 어른들의 말과 행동이라면 무조건 고리타분하다고만 여기는 일부 사람들의 편견도 긍정적으로 바꿔 볼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즉, 양쪽의 노력이 손뼉처럼 잘 마주쳐야만 자연스런 배움과 공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편안한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어른으로 나이 들고 싶다. 내가 풍기는 삶의 향기에서 배울 만한 지혜가 있고 내가 보이는 언행에서 느낄 만한 감동이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내가 가진 것들을 향기처럼 내뿜으며 새로운 씨앗과 새싹 같은 누군가의 성장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른이 얻을 수 있는 중요한 행복일 것 같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할 만큼 조금씩 어른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할머니와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여든 아홉이 되신 나의 할머니는 더듬더듬 손녀의 이름을 부르며 웃고는 하신다. 치매라는 병조차 결코 가져가지 못한 채 남겨둔 몇 조각의 기억들 속에 내가 있다. 그런 할머니를 마주보는 나의 기억 속엔 여전히 할머니의 향기가 가득하다. 앞으로 내가 어른으로서 풍겨갈 삶의 향기에도 할머니가 주신 선물들은 아름답게 스며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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