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영 서원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국민은 누구나 공교육을 받을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학교에 입학하여 의무교육 기간 동안 공교육을 받아야 한다. 공적(公的) 기관이 주체가 되어 공익 추구의 목적으로 운영되는 공교육은 개인의 판단과 결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사교육에 비하여 훨씬 더 큰 중요성을 띤다. 그렇기 때문에 공교육은 모든 학생과 학부모들이 그 목표와 방법에 공감하여 학교와 교사를 신뢰하고 따를 수 있도록 운영되어야 한다. 교육은 훌륭한 안목과 계획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결코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없다. 최근 초등학교 저학년 영어 방과 후 수업 폐지와 관련된 학부모들의 항의 기사를 접하면서 공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해 본다.

예전에는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면 제일 먼저 잉크병과 펜을 준비하여 입학하기 전까지 영어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를 인쇄체와 필기체로 쓰면서 익혔다. 이것이 보통 학생들이 해 오던 최초의 영어 공부 선행학습이었다. 그 후 학교에서 영어 교과서를 배부한 후부터는 새로운 단어와 숙어가 나오면 즉시 암기하면서 영문법 지식을 하나하나 쌓아 나갔다. 그리고 고교 시절에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당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영어 부교재 한 권 정도를 별도로 구입하여 개인적으로 몇 번이고 반복하여 공부했다. 무조건 암기해야 시험에 유리했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매일 소위 ‘빡빡이’라고 하여 종이 여러 장의 앞뒤를 빼곡히 채워서 버려야 했다. 그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하든 한국의 고교생이라면 누구나 영어 공부에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실로 엄청났다.

그런데도 많은 한국인들은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 나의 경우도 국어학을 전공한다는 핑계로 위기 상황을 모면해 오고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의 노력이 왠지 아깝고 씁쓸하다. 미국 대학에 방문교수(visiting scholar)로 일 년 동안 머물던 시절에 거의 무능에 가까운 영어회화 실력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각종 토론회 자리에 참석할 때마다 꿀 먹은 벙어리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창피하기 짝이 없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말문이 막힌 사람은 나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한국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 영어 고득점자들이고 미리 미국 체류를 준비해 온 사람들일 텐데 말이다.

부랴부랴 여가를 이용하여 대학의 영어회화 강좌에 등록하고자 서류를 냈다가 또 한 번 놀랐다. 수준별 반 편성을 위해 수강 전에 치르는 예비시험에서 한국인들은 거의가 고득점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는 공부를 잘하지 못한 나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치더라도 억울함이 있는 건 분명하다. 우리는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영어 듣기와 말하기에 익숙하지 못했다. 모국어는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숙련되기 마련이지만 외국어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영어회화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듣기와 말하기를 외면한 영어 공교육의 방법에서 비롯된 문제로 판단된다. 이런 일을 경험한 사람일수록 국가의 영어 교육 정책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최근에 교육부에서 초등학교 3학년 이전의 영어 방과 후 수업 폐지안을 발표하자 학부모들이 거세게 항의하는 것이다. 사실 예전에는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시작하던 영어 공교육을 초등학교 3학년부터 시작하는 것은 굉장한 변화다. 그리고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이 시기는 외국어 공부를 시작하기에 결코 늦지 않은 시기이다. 그런데도 많은 학부모들이 당국의 계획에 반발하며 나서고 있다. 신뢰가 가지 않는 공교육에만 의지하다 보면 자기 자녀가 남에게 뒤처지게 될 것이 뻔하다는 인식의 팽배와 사교육비의 부담과 같은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다행히도 구세대가 영어의 듣기와 말하기 교육에서 느낀 아쉬움 따위와 같은 케케묵은 이야기는 현대 영어 공교육에서 모두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어린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는 시대의 변화와 상황에 따라서 또 다른 고민과 요구가 생겨나고 있다. 국제화 시대에 영어의 필요성은 굉장히 크며 일상생활에서의 효용가치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므로 자녀들이 어린 시절부터 영어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은 게 학부모 마음일 것이다. 교육부는 그 요구를 빨리 파악하여 대책을 마련하고 영어 교육의 목표와 방법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지속적으로 이상적인 교육 정책을 개발하여 제시하고, 사교육 시장에서 나타나는 현실적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규제를 위한 법제화에 앞서 공교육을 내실화함으로써 공교육이 사교육보다 더 알차며 효과적이라고 인정받을 때 모든 문제는 더 빨리 해결될 것이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