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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치비화(18)/ ‘조선의 지방자치’ 인정하는 통치방침 확립
조선통치비화(18)/ ‘조선의 지방자치’ 인정하는 통치방침 확립
  • 동양일보
  • 승인 2018.03.1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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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호 부이사장

■조선의 지방자치제

▷미즈노 “조선의 통치방침 세 번째는 조선의 지방자치를 인정해 주는 것 이었습니다. 조선의 자치, 즉 홈-룰(Homoe rule)은 인정하지 않기로 했지만, 지방단체의 자치는 그 상황에 따라 점차 이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시 조선인의 참정권에 대한 요구는 대단했습니다. 조선인이 요구한 참정권 내용의 골자는 조선인에게도 제국의회의 의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주고, 제국의회에 대의사(代議士)를 파견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한편으로 보면, 일리 있는 의견이기도 하므로 적당한 시기를 봐서 이를 인정해 주자는 것은 이론의 여지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시점에서 조선의 문화는 지극히 낮은 상태였고, 정치사상 또한 발달치 않은 상태에 있었으므로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주게 된다면 이는 조선인을 위해서 뿐 아니라, 일본의 정치문제에 있어서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차후로 돌리기로 했습니다. 대신 그에 앞서 조선의 지방단체, 즉 부면읍(府·面·邑)의 자치를 허용함으로써 어느 정도나마 정치상 욕구를 만족시킴과 동시 조선인들로 하여금 지방정치에 참여하는 길을 터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시 조선의 지방단체, 즉 부·면·도의 지방행정에 있어 백성들에게는 참여권이 전혀 없었고, 모든 것이 관치(官治) 중심이었습니다. 때문에 백성들에게 다소나마 지방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백성들의 불만 해소를 위해서도 극히 필요한 방법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선 지방단체의 행정기관으로 자문기관을 둠으로써 예산 및 과세 등에 관한 백성들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 성명(聲明)은 실현을 보게 돼 도·부·면 등에 협의회, 또는 평의회라는 것을 설치함으로써 지방 의회를 창설하기에 이르렀고, 어떤 지방에서는 민선의원도 배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 1930(소화 5)년에는 이 자치권이 더욱 확장되었는데, 이는 모두 그 때의 통치방침에 기초를 두고 행해진 것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외 조선인의 보호

▷미즈노 “조선의 통치방침 넷째는 재외 조선인에 대한 보호 취체(取締)의 방법을 수립한다는 방침이었습니다. 재외 조선인이란 주로 만주, 시베리아 등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말하는 것으로 그 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당시 이미 50만 내지 100만 정도를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이들 재외 조선인 중에는 불온한 조선인도 있었고, 조선 내외의 양민을 선동하는 자도 있어, 이로 인해 조선내의 치안이 혼란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국에서는 이에 대한 통제를 하여 그 소굴을 소탕하는 한편, 선량한 조선인에 대해서는 보호정책을 펴 교육이나 산업에 필요한 시설을 해줌으로써 그들을 황민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구체적 방법으로서는 조선 총독부의 관리를 만주에 파견해서 만주에 있는 영사와 협력하여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불온한 조선인을 취체 하는데 협력함과 동시 선량한 조선인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이기로 했습니다. 이를 위해 재만(在滿)영사에게 조선총독부 사무관을 겸임토록 하여 조선총독부 기관으로 기능을 하면서 상호연락을 취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만주에 있는 조선인을 위해 교육기관을 설치한 후, 이에 대한 재정적 보조를 하기 시작했고, 선량한 조선인으로서 개인 사업을 하고자 하는 자에 대해서는 금융 및 기타 편익을 도모해 주었으며, 나아가서는 구료(救療), 감화시설(感化施設)을 만들어 재외선인들이 조선 내에 있는 조선인과 똑같은 혜택을 입을 수 있도록 힘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이들 재외선인에게 조선 내의 진상을 알려 조선 내에 살고 있는 동포가 일본의 정치 혜택을 얼마나 많이 입고 있는지에 대해 널리 홍보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던 것입니다. 이는 재만주인(在滿洲人)에 대한 정책으로 실시되었지만, 조선을 통치함에 있어서도 주요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고, 동시에 대 만주 정책으로서도 매우 유효적절한 정책으로 활용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현재 대두되고 있는 만주 문제의 형태가 주로 재만주인들 사이에서 많은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미 우리들은 그때 당시에 이 점에 대해 상당히 신경을 곤두세워 대책을 간구한 바 있었고, 재만조선인들이 이 지역을 서로 획득하려 한 점에 대해 충분한 검토를 한 후, 중앙에 올라가 외무당국과 협의한 적도 있습니다.”

 

■문화정치와 중추원 개혁

▷미즈노 “다섯째는 문명적 정치를 한다는 것입니다. 조선인들이 우리 제국 통치에 순순히 굴복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평안히 생을 즐기며, 우리 제국의 통치에 대해 감사함을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쓸데없이 억압만 해서 불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통치의 진정한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위 문화정치라는 것을 행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미 유고나 훈시 등에서 그 취지를 제시한 바 있지만, 그 실행 방법으로서는 복잡한 법령 및 수속을 개선하여 사무에 민첩함을 꾀하고, 인재발탁과 민의의 창달에 중점을 둠으로써 불평과 원성의 소리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교육제도를 개선하고 의료 위생의 방도를 넓히며, 민지(民智)를 일깨우고 민생을 안정시키는데 주력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구습을 조사하여 악폐를 개정함과 동시, 좋은 습관은 존중하여 조선 정치와 조선인의 실생활에 적용하도록 노력했습니다. 다음에는 중추원을 개혁하였는데, 과거 중추원 참의는 주로 귀족 및 퇴직관리로 구성되어있던 것을 13도에서 민간 유력자를 선임한 후, 그들로 하여금 중추원 참의를 맡을 수 있도록 개정했습니다. 이로 인해 지방사정을 잘 알고 조선의 구관습 및 구제도에 능통한 참의들이 그 지역 실정에 비추어 꼭 필요한 상황을 자문하고 의견을 제안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입니다. 또한 능력 있는 조선인을 가능한 한 많이 관리로 채용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따라서 총독부 시정에 반항하는 자랄 하더라도 지방민들 사이에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어 조선 정치에 기여할 수 있는 자라고 생각되면, 이를 채용한다는 방침을 세워 실행했습니다.”

 

■교육 및 위생기관의 정비

▷미즈노 “다음에는 교육제도를 정비하였는데 국민학교, 중학교는 일본제도와 아주 비슷하게 고쳤고, 일본 고등학교, 전문학교와 입학관계를 연락해서 이들이 고등교육기관에 입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조선에 고등학교 및 대학을 설립하여 조선 내에서도 계통 있는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고자 했습니다. 또한 고등시험령을 개정하여 고등보통학교 졸업자에게도 수험자격을 주었고, 또 문관임용령을 개정하여 조선인에게도 특별 임용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의료위생기관의 정비 확장을 꾀하여, 도시는 물론 벽지에서도 의료위생 기관이 부족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상과 같은 조선통치방침은 총독께서 조선에 착임하셨을 때 발포한 유고와 훈시에 대체적인 사항이 제시된 바 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결정되었던 내용들입니다. 이 사업들은 1920년에서 1921년 사이에 거의 전부 실행에 옮길 수가 있었습니다. 즉 우리들이 조선 통치방침으로 일단 수립해 놓은 사항에 대해서는 이를 전부 실행에 옮기면서, 한편으로는 치안의 유지를 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위 문화시설을 갖추어 조선인들로 하여금 진정한 황화(皇化)의 혜택을 입을 수 있도록 조치를 강구했습니다. 이러한 계획 및 사업 시설이 조선인들에게 철저하게 침투된 까닭에 1919년의 만세소동으로 인심이 그렇게 흉흉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2년 만에 다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새로운 통치 방식에 대한 결과가 아주 좋게 나타났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결국은 그들이 우리들의 통치에 승복을 하여 나타난 결과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제1차 예산 편성

▷미즈노 “부임 후 이와 같은 와중 속에서도 우리들은 다시 제 1 차 예산을 편성하기 위해 머리를 짜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과거 데라우치 총독시대에 조선 재정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방침을 세워 국고 보조금이 중단된 상태에 있었는데, 조선 총독부 관제개정에 따른 제반개혁을 시행하려면 도저히 보조금 없이 예산을 편성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는 소요 후에 그 흔적을 처리를 하는 때였던 만큼 여러 방면에 막대한 돈이 소요되었고, 이로 인해 예산 편성 시 천만 원이 넘는 돈을 국고 보조금으로 충당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중에 경찰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이러한 방침으로 예산을 편성한 후, 예산을 따내기 위해 제자신이 직접 동경으로 가서 내각과 교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도한 대로 예산을 따내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알았고 적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즉 일본 내에서도 각 성별(省別)로 요구하는 예산액이 매우 많아 조선에 배당될 예산은 겨우 6, 7백만 원 밖에 없다는 것이었고, 때문에 조선총독부의 의견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척식국(拓殖局)과 대장성(大藏省)에서 조선총독부 예산을 심사하였는데, 경찰 비용이 너무 많이 책정되어 있으니 이를 재고해 보라는 성화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실황을 돌아볼 때 무엇보다 인심의 안정을 꾀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었던 만큼, 경찰력에 충실을 기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으므로 저는 강력히 이 사정을 누누이 설명했고, 총독부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당시 대장대신(大藏大臣)은 다카하시고래키요(高橋是淸)씨가 맡고 있었는데, 그는 먼저 일본예산을 정한 후, 그 나머지 예산이 조선에 배당될 돈인데, 6~700만원 밖에 남지 않으니 어떻게 그 정도로 해달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6~700만원으로는 도저히 어렵다고 말하고 오쿠라대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하라다카시 수상에게 직접 담판하러 가서 ‘제가 조선 통치 임무를 맡고 부임해 갈 때에도 예산문제에 대해서 언급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각하께서는 예산문제는 절대로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산을 저희들이 책정한 대로 따낼 수 없게 된다면, 저희들은 조선 통치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 총독부의 원안대로 예산이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하고 간절히 청원했습니다. 하라다카시 수상은 이를 충분히 헤아리시어 ‘그러면 내가 자네에게 기회를 줄 테니, 각의에 자네가 직접 출석하여 의원들 앞에서 조선 사정에 대해 설명을 한 번 해 주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각의에 나아가 조선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고, 조선 통치상 우리가 청구한 예산만큼은 꼭 인정해 주었으면 한다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쿠라대신은 일본 예산이 이미 확정된 상태이기 때문에 남는 돈은 6~700만원 밖에 없고, 이 이상은 도저히 각출할 수가 없다고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일본 본토의 예산도 모두 필요해서 책정된 아주 긴요한 것이겠지만, 조선의 실상은 일본 이상으로 긴박한 상태에 있는 만큼 예산을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일본 본토의 예산을 삭감해서라도 조선에서 청구한 예산만큼은 책정해 달라고 재삼 상조했습니다. 심지어는 각 성(省)마다 100만원씩만 삭감해 준다면, 적어도 800만~900만원은 절약이 되니 이 돈을 조선으로 돌려주면 되지 않겠는냐 말했습니다.”

 

총리대신(總理大臣) 하라 다카시.

■식민지 가봉 폐지론

▷미즈노 “오쿠라대신은 ‘일본 본토의 예산이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조선 예산중에서 비교적 급하지 않은 부분의 예산을 삭감하여 그것을 급한 곳에 돌린다면 좋지 않겠소? 예를 들어 조선에서 일하는 관리들에게는 가봉(加俸)제도가 적용되고 있는데, 이 가봉액이 상당한 금액이란 말입니다. 이 돈을 줄여서 다른 비용으로 할당하면 어떻소?’라며 조선과 기타 식민지의 가봉제를 폐지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 의견을 제시했는데, ‘조선 관리들에게 가봉제를 실시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쓸데없이 예산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실제 조선에 있는 관리의 실상을 보면,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는 관리들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본국에서 조선으로 전보해 오는 사람들 중에는 그나마 가봉제라도 있으니 부임해 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실정이고, 또한 조선에서 근무하는 관리는 가정 형편상 조선과 일본에서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는 사람이 꽤 많이 있기 때문에 만일 가봉제도가 없어진다면 생활이 너무 어려워지게 됩니다. 이러한 점이 있기 때문에 가봉제를 없앤다거나, 삭감한다는 의견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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