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논설위원 / 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이현수 논설위원 / 중원대 교양학부 교수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질문은 하는 것도 받는 것도 부담스럽다. 엄숙한 자리에서 손을 번쩍 치켜들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행위가 모난 것이라는 유교적 편견도 그러려니와 주입식 공교육에 길들여진 탓이다. 학생을 가르치는 나도 예외일 수 없다. 행여 모르는 질문을 받게 될까 노심초사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흔하지 않을뿐더러 대게 기우였다. 수업시간에 질문을 받을 일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도 망설여졌다. 호기심이 거세된 교실은 역동성이 없다. 오래전부터 우린 그렇게 질문이 사라진 사회에 산다. 왜 질문이 없냐고 학생들을 탓할 수는 없다. 우리의 공교육이 공급자 중심 교육이라는 평가에 딱히 이의를 제기할 이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교실에서 창의성과 생동감이 사라지고 노벨 과학상 하나 못 받은 나라로 귀결된 지 오래이다. 질문과 토론은 우리 몸의 혈관과 같다. 이게 막히면 여러 사람의 주장과 의견은 동맥경화에 걸린다. 누구나가 교육의 교감을 이야기하지만 질문이 전제되지 않은 지식의 공유는 애시 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2010년 G20 서울 정상회담 폐막식에서 미국 오바마 전 대통령은 개최국에 대한 배려로 특별히 한국기자에게 질문할 기회를 줬다. 하지만 질문을 기다리는 오바마에게 한국기자들은 그 누구도 질문하지 않았고, 결국 중국 기자가 아시아를 대표해서 질문의 기회를 가져갔다. 질문 없는 사회의 전형을 보여준 모습이었다. 올해 초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이 화제가 되었다. 200여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대통령에 대한 질문권을 따내기 위해 앞 다퉈 손을 드는 보기 힘들었던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질문이 없던 시대를 살던 우리에겐 생경한 풍경이다. 돌이켜보면 어느 전직 대통령은 신년인사회라는 이름으로 출입 기자들을 청와대 상춘재로 초청했지만 사진 촬영도 못하게 했고, 스마트폰 녹음과 노트북 속기를 금지했다. 오로지 수첩 메모만 허용했다. 또 어느 대통령은 신년 국정연설을 통해 국토의 토목화를 제시하는 국정운영 방향을 밝혔지만 기자들의 질문은 받지 않았다. 우린 그런 시대를 무감각하게 살아왔다. 질문은 권위와 종속적 문화에서는 도출되기 어려운 민주적 문화이다.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질문은 곧 답’이다. 질문을 하는 순간 해결이 시작된다. 그것이 개인이든 사회이든 간에 마찬가지이다. 우리 사회는 그간 질문이 실종되면서 여러 사회문제들을 잉태했다. 공동체를 위한 정의로운 질문과 시민의 보편적 권리를 묻는 질문을 대신할 시스템은 미흡했다. 그건 참담하지만 언론과 시민사회 모두의 책임이었다.

예절과 격식을 강조하는 상명하복의 유교 문화권에서 질문은 세대 간의 벽을 공고히 했다.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수단은 그에 대해 ‘묻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질문에 약하다. 거시적이고 교차적인 질문은 더욱 약하다. 보이는 것만 보려 한다. 인터넷을 통한 질문은 대부분 1차적 지식 정보에 불과하다. 깊이 있는 지식과 가치 있는 융·복합 지식은 그에 맞는 질문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사람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린 대면 관계에 익숙하지 않은 고립된 개인주의적 삶을 속절없이 살아간다. 질문이 실종되는 건 당연지사다.

온 나라를 혼미하게 하는 정경유착의 악순환이 끊이지 않는 것은 대부분의 기업에서 벌어지는 경영진에 대한 질문 없는 복종에 있다. 경영자의 부당한 지시에 이의를 제기한 임원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질문이 사라진 기업에서 임직원들 간의 관계가 민주적이고 효율적일 리가 없다. 질문을 통한 자유로운 토론과 상호 소통이 부족한 기업문화에서는 결코 혁신적인 제품과 고객서비스가 나올 수 없다. 독과점적 지위를 잃게 되면 경쟁력 저하는 불을 보듯 자명하다. 인류사의 위대한 스승, 소크라테스의 진면목을 복원한 알랭 드 보통의 ‘철학의 위안’은 질문의 가치를 입증시킨 역작이다. 기원전 5세기 무렵 그리스인들은 노예 소유를 의심해본 적이 없었고 여성은 어떠한 참정권도 없는 일종의 재물이었으며 남자들은 단지 고결해지기 위해 상대방을 죽이고자 한 야만의 사회였다. 사회적으로 체계화되고 정당화된 이러한 상식과 속설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이를 근본까지 파고들어 사회개혁을 앞당긴 이가 소크라테스임을 알랭 드 보통은 역설한다. 질문의 힘이다.

권위적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 사회에 소크라테스식의 질문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무엇인가? ‘모난 돌 정 맞는다’는 통념에 손해 보기 싫었던 침묵의 힘인가? 획일적 질서에 ‘질문 있습니다’를 외치는 호기심의 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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