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이사람] 이두영 청주상공회의소 회장

이두영 청주상공회의소 회장

(동양일보 이정규 기자) 32년. 젊은 청년 이두영(67)이 낯선 도시 청주로 와 기업을 일군지 벌써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다.

6.25 동란이 끝나지 않은 1951년, 경기도 이천 농촌에서 4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넉넉지 않은 집안 사정으로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도 없었다.

무일푼, 빈손으로 무심코 고향을 떠난 그는 소개로 만난 아내 곽희순(66)씨를 따라 청주로 오게 됐다.

가난한 시절, 서민들이 살던 옛 사직동 주공아파트에서 살기 시작한 그는 집을 사기는커녕 전세금이 모자라 일부 월세를 안고 살림을 시작했다.

가족들을 책임져야만 하는 가장의 무게는 그를 닥치는대로 사업 전선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그러다 만난 건설업. 장호원에서 상수도 관로 사업을 우연히 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됐다.

당시 청주에는 변변한 아파트가 없었다.

중심가 시내 건물도 2층, 3층. 높아야 3층, 4층 건물밖에 없었다.

그는 빌딩 5~6층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의 건설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아파트 건설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처남 때문이었다.

청주에서 최초로 지어진 아파트, 삼영맨션이 처남의 작품이다.

그가 아파트를 선택한 것은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주택보급률이 낮았던 그 시기에 가난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생각하며, 서민들에게 집을 마련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시대적인 도움도 받았다.

때마침 노태우 정부가 주택 200만호 건설 정책을 펼치면서 아파트 건설 붐이 일게 된 것이다.

그는 서민들을 위한 임대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목돈을 들이지 않고 아파트에 살 수 있는 길이 임대아파트여서, 그는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조금씩 사업이 번창하며 안정권에 접어들 무렵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1997년 11월, 전 국민을 사지로 내몰았던 IMF가 터진 것이다.

당시 임대아파트를 공급했던 건설사들은 임대비가 걷히지 않았고 결국 아파트를 처분해야 하는 지경으로 내몰렸다.

그렇다고 아파트를 비싼 가격에 팔 수도 없었다. 이미 정부가 가격 산정 기준을 책정해 놨기 때문이다.

IMF 시절 임대아파트를 공급하던 건설사들의 줄도산이 이어졌다.

충북에서는 주택건설사 30개 이상이 모두 문을 닫았다.

그가 설립한 두진건설도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맨손으로 일군 두진을 그는 뚝심으로 버텼다.

꼼꼼하고 알뜰히 챙긴 그의 회사는 주변 모든 건설사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때 꿋꿋이 지켰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싫다.

1997년 IMF 사태 발생 1년전쯤 그는 방송을 만나게 됐다.

풀뿌리 민주주의, 지방의 균형발전, 지역 발전 차원에서 민영방송사가 전국적으로 설립하게 됐다.

개국 준비를 마치고 1997년 10월 CJB청주방송이 개국했다.

건설맨에서 언론인으로 새로운 길을 걷게 된 순간이다.

그러나 개국한 지 불과 한달만에 터진 IMF로 건설 사업이 어렵게 되면서 적잖은 비용이 들어가는 방송국 경영이 녹록지 않았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는 그러나 방송은 공적기능을 하는 사업이라고 판단, 일부 사업을 축소하면서까지 방송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런 그의 노력과 탁월한 사업적 수완은 CJB청주방송을 오늘날 21주년을 맞도록 했다.

지역민들에게도 생소한 방송을 정착시키고 언론의 역할을 할 수 있기까지 정말 땀내 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건설사업은 힘에 부쳤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버텨냈다.

2010년부터는 아들(이규진 두진건설 대표)이 맡아 재도약의 길을 걷게 됐다.

두진건설은 ‘하트리움’이라는 브랜드 아파트를 지으며 도내 10위권 내 건설사로 성장, 당당히 지역 건설업계를 선도하고 있다.

쉴새없이 달려온 그는 휴식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글자 그대로 ‘조강지처(糟糠之妻)’인 사랑하는 아내와 필드를 걸으며 어려웠던 그 때를 추억하며 보내는 시간은 그에게 가장 큰 행복이다.

하지만 시대는 또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청주상공회의소 회장’.

그는 지난 14일 23대 회장 취임식을 갖고 상공회의소 회장직을 본격 수행하게 됐다.

고민도 많았다. 아내도 찬성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회장직을 수락하게 된 이유는 한가지다.

어느때부터인가 기업인에 대한 이미지가 존경받지 못하는 그런 사회가 돼버린 점 때문이다.

그는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다. 아너소사이어티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클럽을 말한다.

그의 아내도 적십자사에 고액을 기부하는 클럽 레드크로스 아너스클럽 회원이다.

부부가 모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다.

기업인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음에도 공격의 대상으로만 인식돼 있는 이 사회의 모순적 구조와 분위기를 일신시키고 싶다는 것이 그의 심정이다.

또하나, 그는 정상회담을 앞둔 남북 관계,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로 촉발된 대미 무역의 위기, 끝간데 모르는 내수경기 부진 등 대내외적인 기업 환경이 어렵게 되면서 무언가 지역 기업들을 위해 봉사해야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아마도 최악의 환경에서 고단했지만, 결국 성공으로 이끈 그의 경험을 조금이나마 나누고(sharing)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내년에는 청주상의가 창립 100주년을 맞는다.

한층 더 지역 기업들의 애로를 해결하려 불합리한 규제를 철폐하고 기업 지원 정책을 정부와 유관 기관에 건의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포부다.

또 상의 회원들이 바라는 회관 건립도 임기내 반드시 이루겠다는 꿈도 있다.

그는 “요즘처럼 경영 환경이 급변하는 때일수록 상공회의소가 종합 경제 단체로서 그 기능과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며 “지역 경제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데 소홀함 없이 회원사와 상공회의소 발전에 혼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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