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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국민보도연맹 반공부대를 창설했더라면<이석우>
풍향계-국민보도연맹 반공부대를 창설했더라면<이석우>
  • 이석우
  • 승인 2018.03.26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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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시인

 세계적으로 알려진 베트남 미라이 촌이나 90년대 이후 르완다나 코소보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보고되었을 때 우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디 그뿐인가 제주 4.3 사건이나 거창 사건 그리고 보도연맹 사건 등이 특별법 제정 등을 통해 설마 했던 일들이 잔혹한 참상으로 국민들에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충격과 비분함을 어디에 비견할 수 없었다. 또한 누구나 다른 선택의 길은 없었을까하는 안타까운 생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특히 국민보도연맹 사건(이하 보련)의 경우 더욱 안타까움을 가중시켰다.

1949년에 이르자 한국정부는 국가보안법 제정 등을 통해 남한 내의 모든 좌익 활동을 금지하고 남로당원을 체포한 후, 보련까지 조직하여 공산당 활동을 거의 위축시킬 수 있었다.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여순 사건 등을 거치면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다. 당시 1949년 1월 22일 동아일보에 1949년 1월 10일까지 3392명의 희생자가 났다는 보도가 올라온다.

이러한 남한 내의 상황은 전쟁만 일으키면 ‘남한 내 주민 100만여 명이 일제히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는 박헌영의 호언장담과 맞물리며 김일성의 조급증을 자극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미군정과 남한 정부가 정국안정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낼 찰라,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느닷없는 침공을 맞게 된 것이다.

북한군은 38도 선 전역에서 야포와 박격포를 동원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1군단은 연천, 운천, 의정부를 축으로 하여 개성과 문산에 걸쳐 전투병을 집중시켰다. 제2군단은 소련제 T-34전차와 76밀리 자주포를 앞세우고 단숨에 38선을 돌파해 버렸다. 6월 28일 서울과 춘천 그리고 강릉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29일 김포비행장 마저 점령당하였다. 7월 2일 원주, 7월 3일 인천, 7월 4일 삼척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제4단에 의해 7월 8일 천안이 떨어지고 인민군 6사단은 서해안 지역의 예산을 향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이 순간 보련은 필시 인민군에 동조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보련은 본래 공산당이던 자가 전향하여 배신하였으니,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배신자처단 사태가 난무할 것이라는 예상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이런 생각들은 일부 약삭빠른 보련원을 인민군 쪽을 항하여 움직이게 만들었다. 6월 27일 강화도에서는 인민군이 들어오자 보련원이 적극 나서기도 하였고, 3일 만에 서울이 인민군 수중에 떨어지자, 일부 보련원들이 인민재판에 열을 올리고 잔류 남한 정부인사 및 군경 색출에 혈안이 되었다. 북한군에 의해 '기회주의자의 표본'으로 후에 처단되긴 했으나, 보도연맹 명예간사장까지 맡았던 정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국정부는 예비검속 중이던 보련원 모두 인민군에 동조할 것이라고 속단해 버리고 학살하기 시작한다. 학살은 7월 1일부터 시작하여 20만에 이르는 양민을 희생시키고 말았다.

북한은 인민군의용군을 만들어 남로당원으로서 변절자(보도연맹 가입자)도 의무적으로 의용군에 참가시키라는 규정을 로동신문(1950년 7월 12일자)에 싣고 있었다. 북한이 취한 보련의 의용군 참가 허용은 강화도 사태와 유사한 인민군에 동조할 세력을 확대시킬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역으로, 한국정부에서 국민보도연맹 반공부대를 창설했더라면 보련원 거의 모두 인민군과 싸우다 장열하게 전사한 애국청년들이 되었을 것이다. 내 고향 골짜기에서 내 고향 군경에게 총살당한 것도 억울한데 부모형제가 연좌제에 묶여 숨소리를 작게 토하며 세상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한스러웠던가. 그런 삶은 없어도 되었을 터이다. 농사일 하다말고 대부분 젊은이였던 보련원은 경찰지서 집합통지를 받고 서슴없이 지서로 달려가 군용트럭에 실려 가면서, 화장실에 다녀오라고 기회를 쥐도 그냥 경찰의 말을 믿고 실려 가면서“피난시키려나?, 보급 노무원으로?, 지원 국방군으로?, 나라를 위한 일터로 데려가려나?”하는 순진한 생각들을 했었다고 한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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