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논설위원/중원대교양학부교수

 

김광석 노래를 들으며 유난히도 짧은 봄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만 이런 게 아닐 것이라는 믿음도 든다. 제아무리 세상을 삐딱하게 이분법적 시각으로 본다 한들 음악은 사람과 분열을 동여매고 또 때로는 시간을 붙잡아주는 위로이기 때문이다. 꼰대든, 서슬 퍼런 청춘이든 김광석의 노래에 고단한 시대, 봄날 같았던 일상을 소환할 이들은 나 말고도 숱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광석이든 안치환이든 아니면 정태춘이든 저마다의 감성으로 불러낸 시대의 선율들은 가슴속 활성 단층으로 견고하게 자리 잡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단하지만 불현듯 움직이며 존재를 뒤흔들 순수의 활성단층 말이다. 봄날에 듣는 김광석의 부드러운 노랫말은 쓸쓸함과 슬픔, 외로움을 나지막이 읊조리며 섬세하게 삶의 피로를 자극한다. 시를 즐겨 읽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가사는 정갈하고 단아하다. 그래서인지 시에 멜로디를 살포시 얹어 타인들을 위로한 노래들이 유독 많다. 음유시인의 전형이다.

그의 노래 그날들을 들으며 삶에 지쳐 잠시 봉인하고 살던 가슴 시린 기억들이 활성 단층의 격한 준동으로 깨어난다. 봄기운일지도 모르겠다. 몹쓸 미세먼지는 안중에도 없이 마음은 그의 노래처럼 먼지가 되어허공에 가벼이 흩날린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웃음 진 산수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노래들을 들으며 흐려진 기억들은 미워하지 않는 연민으로 재생산된다. 시대의 고난에 힘겨워하는 학생들에게 김광석의 감성과 위로를 살포시 건네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단하고 지친 일상을 살아내며 김광석의 수많은 노래들은 심연 깊이 쪼그라들었지만 문득문득 들려오는 라디오에서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따라 읍 조릴 때, 그 공감의 넉넉함이란. 내게 김광석의 노래는 그랬다. 공감의 위로였으며 슬픔의 정당화였다. 작년 겨울을 달구었던 그에 얽힌 과거지사들은 체증 같았다. 그 불편한 풍경 앞에서도 한결같이 지나온 시절을 응시하게 해주는 삶의 영사기가 있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다. 김광석은 청춘의 영사기 같은 존재였다. 무엇으로도 치장하지 않은 그의 목소리는 오랜 벗의 친근함으로 다가선다. 울음을 삼키는 떨림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연대의 힘이 녹아있었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 김광석의 콘서트를 가 본 덕후로서, 신파인 듯 아닌 듯, 꿈인 듯 아닌 듯한 노랫말에 훌쩍이던 청년의 시절, 유달리 푸석푸석하고 황량했던 내 청춘의 유기농 비료 같던 김광석, 메시지가 저항적이고 스트레이트 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두웠던 80년대, 모든 사람들이 그의 노래에 심취하고 위로받고 거기서 희망을 찾았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내 안의 체 게바라였고 성자였다. 사람들은 그의 노래가 시대성이 있기 때문에 좋았다고 말하지만 그의 노래는 자유가 포획된 시대에 이념으로 묶여있다기보다 보편성으로 해방되었다고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시대에서 태어나서 보편으로 자랐다고 해도 괜찮다. 아무렴 어떠랴.

대학로 학전 소극장 앞에 있는 김광석의 부조상에는 그의 말이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람들이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잘못된 사실에도 대충 익숙해져 버리려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그런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한 번쯤 ,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하고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제 노래 인생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봅니다.”

슬픔이 슬픔을 치유한다는 말일 게다. 시대가 요구하는 소통의 힘을 말한 것 일 것이다. 지금은 비록 알량한 손익계산의 처세로 사회화의 강물에 휩쓸려 둥둥 떠다니고 있지만, 그의 노래를 들으니, “아 나도 저런 때가 있었다는 게 기억나하며 사람들은 서늘한 자신의 존재를 따뜻한 성찰의 시선으로 돌아볼 것이지 않은가.

영화 ‘1987’을 보며 시대의 아픔에 눈물 훔쳤을 이라면 그의 노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부르며 인생의 봄날을 흔들어 보시라. 정호승의 시에 곡을 붙인 부치지 않은 편지를 마음에 담아 봄꽃을 피우시라. 나이 듦은 기억을 담보로 이해를 빌려주는 것이 아니던가.

아련한 봄날이 훅 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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