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자 (청주시 서원구 행정지원과 기획통계팀장) 

 

전국 곳곳에서 벚꽃이 피어나고 있다. 최근 사진을 정리하다 지난해 무심천 벚꽃 아래서 시아버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올해는 벚꽃이 피어도 시아버님에게는 정말 ‘벚꽃엔딩’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12월 시아버님은 고단한 삶을 마감했다. 우리 가족은 참으로 오랜 세월 시부모님과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시부모님은 5남매를 두셨고 남편은 5남매 중 넷째로, 아들로는 둘째로 태어나 유별나게 말썽도 많았고 기대도 컸다. 1993년 12월 남편은 결혼과 동시에 갑자기 효자가 됐다. 당시 남편은 고시공부 중이었고 내가 직장을 다니며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겨우 주말에나 쉬는 나를 데리고 어김없이 시골로 향했다. 한 달이면 두세 번씩 시골에서 주말을 보내고 나면 출근하는 월요일은 하루 종일 피곤함에 지쳐 있곤 했다. 
어린 시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중년의 중풍 후유증으로 인지력이 떨어져 살림을 잘 돌볼 줄 모르던 시어머님은 1997년 또다시 중풍을 겪어 시골 살림은 더 형편없어졌고, 농사밖에 모르는 시아버님 또한 살림을 돌보지 않아 식사는 물론 빨래, 청소 등 살림은 늘 엉망진창이었다. 토요일 오후 직장에서 퇴근해 바로 시골에 내려가 시어머님을 목욕시키고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를 하다 보면 온몸이 뻐근해져 잠이 들곤 했다. 
2004년 5월 시어머님이 고관절 골절로 입원하시면서 시부모님은 청주로 이사 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시어머님은 퇴원해 재활치료 중 또다시 찾아온 중풍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기관지 절개와 경관 급식으로 생명을 유지하기 시작했고 남편이 대소변을 받아내는 등 병수발을 전담하게 됐다. 얼마 후 2007년 시아버님마저 중풍과 핵상운동마비병으로 점점 거동이 불편해졌고 곧 일상생활이 어려워져 경관 급식을 하고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다. 
남편은 고시공부를 완전히 포기하고 식물인간이 된 시어머님과 전신마비의 시아버님 병 수발에만 전념했고 나는 아들을 돌보며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처음에는 이렇게 오랜 세월 시부모님을 돌보게 될 줄 몰랐다. 남편의 지극정성이 통했는지 경관 급식과 욕창과 폐렴 등 각종 병마 속에서도 두 분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먹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였지만 10여 년이 넘게 사시다 시어머님은 2013년 4월(당시 85세), 아버님은 지난해 12월(당시 94세)에 길고 고단했던 삶을 마감하셨다.
삶이란 무엇일까? 세상을 인지하지 못하고 누군가에 의해 삶을 이어갔던 시부모님, 가족만을 위해 젊은 날을 희생한 남편! 남편은 어떤 누구의 생명도 소중한 것이며 비록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삶이라도 가족이 지켜줘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불쌍하면서도 우리를 고달프게 하는 시부모님은 어려운 숙제로 머리로는 이해가 가면서도 갈등의 연속이었다. 
남편의 고집스러운 정성과 너그러운 성격이 아니었다면 이 모든 일들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아들은 대학원생이 돼 제 길을 찾아가고 남편은 50대 중반이 돼 남들은 퇴직할 나이에 취업을 준비하는 ‘취준생’이 됐다. 아들과 나는 ‘취준생’이 된 남편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면서도 우리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웃을 수 있었던 건 남편이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남편은 언제 어디서나 도움을 요청하면 나타나 해결해주고 어려운 문제를 풀어주는 우리에겐 ‘슈퍼맨’이었다. 시부모님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벚꽃이 피어나는 4월이다. 저세상에서도 벚꽃이 필까? 그렇다면 시부모님께서도 벚꽃 아래 아들(남편)과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이제 사회인이 되려는 남편을 도와주시길 기대해본다. 이제는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하지만 무심천 벚꽃 아래서 남편과 함께 힘들었던 지난날들을 이야기하며 회상에 젖어봐야겠다. 벚꽃 아래서 행복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삶에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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