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병에 양념류를 담아 파는 식료품 가게. 아나바다가 습관된 쿠바에서 라벨을 보고 선뜻 물건을 고르면 곤란하다.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처음 브리가다 캠프 참가했을 때 몇 번이나 깜짝 놀랐다. 뚜껑 부분 잘라낸 플라스틱 용기를 우유 담는 그릇으로 쓰고 있었고, 고물상에서 내다버린 거울이 세면장에 걸려 있었다. 거기 비친 얼굴은 피카소 그림과도 같아 보였다. 하지만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인 캠프여서 절약 정신을 본받으라는 뜻이라 여겼다. 쿠바에서는 누구나 재활용에 길들여져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과일이나 채소 가게는 물건 담을 비닐봉지 한 장 주지 않는다. 쿠바에서 흔해 빠진 설탕을 사려해도 그걸 사려면 그릇이 필요하고, 모카 포트에서 끓인 커피도 보온병을 가져가야 사 올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직접 채취한 꿀을 럼주 병에다 넘치도록 담아 사람들 붐비는 골목 어귀에 내다 팔기도 한다. 요리에 쓰일 소스를 사러가도 진열해 둔 병의 라벨을 보고 고르다보면 헛다리짚기 십상이다. 어떤 소스가 담겼는지, 값이 얼만지 알려면 좌판을 유심히 들여다봐야 하는데 삐뚤빼뚤 쓴 분필 글씨를 읽을 때마다 문화적 충격을 느낀다.

비아술 버스가 삼십 분 가까이 정차한 상띠 스피리투스 터미널. 식사 시간이 꽤 지나선지 배가 슬슬 고파온다. 버스에서 내려 화장실 다녀왔더니 허기져서 걷기조차 힘들 지경이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먹을 만 한 게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흐릿한 눈으로 바라본 길 건너편, 두 평 크기 피자 가게가 눈에 띈다. 먼지며 매연이 마차 발자국 소리와 뒤엉킨 도로를 가까스로 가로질러 가게로 다가간다. 안팎을 바삐 드나들던 피부 하얀 아가씨, 피자를 굽거나 햄버거를 만들다가 주스 담긴 컵을 몇 차례 내 오기도 한다. 줄 서서 기다리던 중 벽에 걸린 이르마 간판에 눈길이 쏠린다. 얼마 전 여길 할퀴고 간 허리케인 이름인데 하필 그걸 쓸 생각을 했을까. 한쪽 구석에 또 다른 간판이 세워져 있는 데도. 고개 갸웃거리다가 뒷사람에게 물어본다, 어째서 간판이 두 개냐고. 그에게서 오전 오후로 나뉜 두 사람이 장사한다는 기막힌 대답이 건너온다. 가게 하나로 자기 입맛에 맞는 시간을 골라 장사하는 그들 지혜가 놀랍다.

내 차례가 되어 물어본 주인 아가씨 이름은 유리아다. 오후반 하프 타임 가게 주인에게 피자와 곁들인 나랑하 주스 한 잔을 주문한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재빨리 구워낸 피자를 주문 받은 음료수와 햄버거랑 건네며 고맙단 말을 소스 대신 끼얹어 준다. 가만히 들여다본 유리컵 모양이며 색깔이 제각각인 게 신기하다. 내 앞에 놓인 컵, 희미하게 비치는 글씨를 꿰맞춰 보니 쿠바산 럼주라고 돋을새김 되어 있다. 가장자리 높낮이도 다른 데다 울퉁불퉁해서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레 더듬어 나간다. 누군가가 손 다칠까봐 잘라 내고 남은 부분을 꼼꼼하게 다듬은 게 틀림없다. 하이네켄 맥주병은 두께 얇아 쉬 잘라지고 가벼워서 널리 재활용되고 있다.

군복 입은 피델 카스트로 사진 걸린 야채 가게. 순무며 시금치, 쪽파, 토마토나 오이를 사려고 줄 지어 선 그들은 집에서 가져 온 제각각 다른 장바구니를 들고 있다. 생필품 사러 갈 땐 누구나 그릇을 준비하고, 다 쓴 비닐봉지를 뒤집어 씻고 말려서 재사용하는 데 길들여져 있는 쿠바노, 그걸 오래 지켜보고서 본받은 건지 호텔 정원 어슬렁거리던 공작마저 벽돌 구조 바비큐 숯가마 위에 올라가 지친 다리를 지진다.

쿠바노들이 누구나 즐겨 먹는 아이스크림 파는 가게, 꼬뻴리아에서도 쓰레기가 될 일회용기 대신 플라스틱 접시에 그걸 담아낸다. 하지만 칙칙한 접시 색깔에 비해 맛은 기막히다. 콘 아이스크림 사 먹을 때도 고봉으로 얹힌 걸 재빨리 삼키지 않으면 줄줄 흘러내려 손이며 신발이 엉망이 된다. 그릇은 아까워해도 아이스크림 인심은 더없이 후하다.

빵집에 들러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시골풍의 도시, 한 가지 생일 케이크만 파는 가게 앞 긴 줄을 보고서 울띠모? 라고 말하며 뒤따라 선다. 방금 돈을 건네고 케이크를 안은 채 나오는 손님에게 가격을 물어본다. 그녀의 턱짓에 따라 벽 쪽으로 시선을 옮겨 가격표를 읽고서 깜짝 놀란다. 백 팩 크기의 케이크가 우리 돈으로 600원 남짓이라니. 네 명이 한꺼번에 먹기 힘들 정도지만 찌그러지지 않도록 포장이 되었다면 값이 몇 배로 뛰었을지.

길에서 파는 닭고기 크로켓, 영양 그득하고 맛난 게 누드인 채 손님에게 건네지고, 요리할 때 빠지지 않는 마늘마저 노끈 아끼려고 대궁으로 타래를 엮는다. 마늘 몇 묶음을 어깨에 걸치고 외치는 ‘아호 아호’ 소리는 자기네보다 재활용 잘하는 나라가 없다는 걸로 들린다. 외국인 전용 시외버스 비아술 터미널에 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키보드를 두드려 출력하는 도트 프린터엔 쓰다 남은 종이를 찢어 위에다 꽂은 뒤 기다린다. 도트도트, 까마득 잊었던 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승차권이 곧바로 얼굴을 내밀지만 방금 프린트한 글씨가 제대로 보이지 는다. 하지만 절약이 습관 된 그들에게 리본 카트리지 바꾸라고 간섭하는 건 실례다. 일회용품이나 플라스틱 쓰레기 넘쳐나는 걸 막으려면 쿠바를 롤 모델 삼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