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덕(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작고한 김형효 교수
최진덕(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내가 슬프지 않았던 이유

지난 2월 24일 토요일 오후, 우리 시대의 ‘외로운’ 철학자 김형효 선생(1940~2018)이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1970년대 중반 서강대에서 처음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고, 그 후 지금까지 무려 40년 넘게 선생님의 애제자였던 만큼, 이 뜻밖의 부고에 누구보다도 슬퍼해야 옳았다. 하지만 약간 먹먹할 뿐 그다지 슬프지 않았다.

약간 먹먹했다 함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선생님이 2013년 여름 이후 치매증상이 나타나 외부활동을 중단하고, 주로 집안에 칩거하셨지만 선생님의 얼굴은 늘 미소를 머금은 채 해탈한 표정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그 표정을 이젠 더 이상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쉬워 목이 메어오면서 먹먹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슬프지 않았던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이유는 선생님이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과 깊은 통찰력으로 평생에 걸쳐 길고도 다채로운 철학적 사유의 여정을 걸어가는 동안, 25권의 묵직한 철학저서를 남겼다는 것이다. 아마 수백 년 뒤 누군가가 한국철학사를 쓴다면 대한민국시대의 대표철학자로 반드시 선생님을 꼽아야 할 것이다. 선생님의 육신은 이미 사라졌지만 선생님의 말은 아직 남아있으니, 철학을 하는 나로서는 선생님의 죽음을 크게 슬퍼할 이유가 없었다.

둘째 이유는 선생님이 철학적 사유의 극치에 이르러 철학적 사유 자체를 초극했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굵직한 저서를 낼 때마다 나는 자랑스러운 한편, 내심 부럽기도 했지만 정작 선생님 자신은 자랑하는 마음이 별로 없었다. 은근한 자부심 정도야 없지 않았겠지만, 노년에 이를수록 자부심마저 거의 다 사라지고 무념무상의 경지에 접근해갔다. 무념무상에는 철학적 사유마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치매증상이 나타나기 전 노년의 어느 날 선생님은 물었다. “최 선생, 우리는 왜 그 좋은 젊은 시절부터 인상을 찡그려가며 쓸데없이 철학을 했을까?” 솔직히 말해 남들보다 잘난 체하고 싶다는 욕심에서 철학을 시작했던 나로서는 별로 할 말이 없어 멋쩍게 웃기만 했다. 선생님은 말했다. “철학 같은 건 필요 없어.” 이 말을 듣자 문득 선생님의 철학적 사유가 이제 절정에 이르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함께 지금 당장 돌아가시더라도 내가 슬퍼할 이유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철학계의 이단자, 지식인사회의 이방인

선생님의 장례식은 매우 초라했다. 서강대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가르친 몇몇 제자들 외에 학계인사들은 거의 오지 않았다. 중앙 일간지 어디에도 선생님의 철학적 업적을 기리는 기사는 실리지 않았다. 선생님만큼 우리 시대를 걱정한 철학자도 없었지만, 우리 시대는 선생님을 기억하려들지 않았다.

조선시대 이래 오늘날까지 한국의 지식인사회는 몸을 가진 인간이 그 안에서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사회경제의 구체적 현실보다는 실현 불가능할 정도로 고원하기만 한 추상적 이상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철학계는 그런 이상주의적 경향이 특히 심했다. 선생님은 서른도 채 안 된 나이에 벨기에 루뱅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자마자 한국 지식인들의 이상주의적 경향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구체적 현실에 뿌리박은 철학적 사유를 제창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처음부터 철학계의 이단자였고 지식인사회의 이방인이었다.

선생님이 “이상과 현실의 양가적 묘합”을 강조하면서 이른바 “구체철학”을 제창하기 시작하던 1970년 무렵, 박정희 대통령은 이상주의적 지식인들의 험담에 시달리는 가운데 “잘 살아보자”는 촌스러운 구호를 내걸고 경제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1960년대 어느 겨울 서울대 졸업식 치사에서 “강단의 어설픈 관념론(이상주의)”를 버리고 “냉엄한 현실”을 직시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선생님과 박정희는 살아생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고원한 이상의 하늘로부터 비근한 현실의 땅으로 내려왔다는 점에서 정신적 공통분모가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이상주의적 경향이 강한 한국 지식인사회에서는 용납하기 힘든 스캔달의 조짐일 수 있었다.



●현실참여와 좌절, 마음의 큰 상처

선생님은 서양철학에 대해 누구보다도 해박하고 정통했다. 거기에다 이 땅의 정신적 전통을 이해하기 위해 귀국 후 동양철학까지 배웠다. 기존의 이상주의 철학을 뒤집어엎는 선생님의 구체철학은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풍부한 지식과 날카로운 통찰력에 의해 다채롭게 전개되었다. 선생님의 강의는 새로운 것을 갈망하던 1970년대 학생들 사이에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나는 선생님에게 매료되어 학과를 옮겨버렸다. 선생님의 인기는 대학에서 그치지 않았다. 언론에서도 주목했다. 선생님은 이를테면 스타였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지식인들이 경멸해 마지않던 새마을운동을 지지하면서, 선생님은 어용교수라는 낙인이 찍히고 비난과 욕설의 표적이 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해명을 요구하자 선생님은 강의노트를 덮고 팔을 걷어붙이고는 경제적 가난과 약소국의 비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40년 전의 그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학생들은 “저 교수 사꾸라야”라고 수군거렸다. 학생들마저 도무지 설득이 되지 않았다. 이상주의적 경향은 그만큼 뿌리가 깊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비판과 욕설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1980년대 들어 선생님은 사유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현실참여에 나섰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을 지내고, 민정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선생님의 현실참여는 한 점의 사심도 없이 자신의 철학적 소신과 애국심에 따른 것이었지만, 어용교수라는 낙인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선생님의 상징이 되었다. 1987년 6.29와 함께 선생님의 정치적 몰락은 불가피했다.

지인들은 등을 돌렸다. 선생님의 덕을 본 사람들까지 선생님을 비난했다. 당시 어떤 교수가 내게 말했다. “김형효는 끝났어.” 권력의 단맛을 보았으니, 더 이상 공부하지 않을 거라는 냉소였다. 학생들은 “어용교수 물러가라”는 피켓을 들고 연구실 앞에서 시위를 했다. 40대 말의 선생님은 자신의 철학적 소신과 애국심이 가져온 참담한 결과에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견디기 어려운 실존적 고통과 함께 인간과 역사에 대한 아득한 절망이 선생님을 엄습했다.



●불교, 철학적 사유의 종착역

선생님의 철학적 사유는 1980년대 말(40대 말)을 고비로 선명하게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나는 그때 겪은 실존적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생님의 철학적 몸부림이 1990년대 이후(50세 이후) 선생님의 철학적 사유와 방대한 저술을 가능케 만든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선생님은 2005년 정년을 할 때까지, 거의 20년 가까이 몇몇 제자들과 극소수의 동료교수들 외에 아무도 찾지 않는 가운데, 매일 오전 9시 반쯤 연구실에 나와 오후 7시 반쯤 퇴근하는 생활을 어김없이 반복했다. 원고청탁도 강연요청도 거의 없었다. 사실상 유폐생활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외로운 유폐생활 속에서 사유와 명상에 침잠하여 보란 듯이 무게 있는 철학저술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정년할 무렵 열암학술상을 받고, 정년 이후 몇 가지 학술상을 더 받았지만, 학계 그중에서도 특히 철학계의 반응은 냉담 일변도이거나 아니면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판뿐이었다. 이 때문에 선생님은 짓밟힌 자존심을 회복하고 세상에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기 위해, 수많은 저술을 했을 것이라고 흔히 짐작한다. 하지만 1996년부터 정년 때까지 10년 동안 바로 옆 연구실에서 아침저녁으로 선생님을 지켜봐온 내 판단은 전혀 다르다.

선생님의 왕성한 저술활동은 상처받은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고, 더 나아가 좌우의 대립, 동서의 대립을 넘어 한국사회가 나아갈 길을 여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 안심입명의 길을 여는 것과는 거리가 먼 자기 과시 따위는 선생님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었다. 선생님의 후기 철학적 사유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대강이라도 알면 내 판단에 수긍하기가 쉬울지 모른다.

선생님의 철학적 사유는 구조주의에서 시작해서 해체주의로 나아가고, 해체주의를 통해 노장을 재발견하는 한편, 데리다의 해체주의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의 표절임을 알고는 다시 하이데거를 읽고 심취하게 된다. 그리고 하이데거를 통해 선생님은 불교를 재발견하게 된다. 불교는 선생님의 철학적 여정의 사실상 종착점이었다. 선생님은 몸과 마음을 다해 불교에 귀의했다. 연구실에 나오면 제일 먼저 목탁을 두드리면서 염불을 했다. 선생님은 “나는 머리 안 깎은 중”이라고 말했다. 속세를 떠나려는 사람한테 속세의 잣대를 들이대지는 말자.



●‘무(無)’ 한 글자의 의미

구조주의와 해체주의로부터 시작해서 하이데거를 거쳐 노장불교에 이르는 사유의 도정은 선생님이 젊은 시절부터 좋아하지 않았던 저 추상적 이상을 지워나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추상적 이상은 때로는 도덕적 당위가 되고 때로는 사회적 정의가 되어 인간을 흥분시키고 그의 열정을 불태워 세상을 대립과 갈등의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추상적 이상을 지워나가는 과정은 또한 그것을 불변의 실체로 고집하는 자아의식을 지워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법집(法執)과 아집(我執)을 동시에 지워가는 과정이었다. 법집과 아집을 다 지우고 나면 남는 것은 천지만물이 서로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한 관계 속에서 시작도 끝도 없이 흘러가는 우주와 역사의 현실뿐이다.

그 연기의 현실세계를 선생님은 데리다의 말을 빌어 “차연의 세계”라고 불렀다. 젊은 시절 선생님은 “이상과 현실의 양가적 묘합”을 주장했지만, 노년에 가면 이상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현실만 남는다. 선생님은 그런 현실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바로 철학이라고 자주 말했다. 있는 그대로 보려면 자아를 지워야 하고 자아를 지우려면 목숨까지 포함해서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 물론 철학적 사유도 버려야 한다.

선생님이 50대 중반에 도달한 철학적 사유의 종착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엔 “무(無)” 한 글자가 있을 따름이었다. 무는 현실을 떠나 따로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따로 있는 어떤 것이라면 유(有)이지 무일 수 없다. 하지만 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다. 현실 전체가 무다. “존재가 곧 무”라고 하이데거는 말했다. 법집과 아집을 지우고 무로 돌아감이란 변화하는 현실 전체를 다 긍정함이다. 그것은 물론 추상적 이상의 완전한 포기이기도 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선생님의 치매가 본격화되기 이전 내가 들었던 마지막 가르침은 “철학은 이제 필요 없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즐겁게 살면 된다.”였다. 본성과 본능의 구별까지 걷어치운 최말년의 선생님은 니체를 최고의 철학자라며 좋아했다. ‘모든 것이 다 좋다’는 전면 긍정이야말로 노장불교의 마지막 귀결이자 니체 사상의 마지막 귀결이다. 무를 체득한 마음은 고요하다. 주어진 무언가에 대해 나쁘다고 부정하면 마음의 고요는 깨어진다. 거울처럼 고요한 마음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봄이란 모든 것을 주어지는 대로 다 긍정함과 다르지 않다.

선생님의 철학적 사유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삽하게만 들릴지 모르겠다. 나 자신도 아직 정리가 잘 안 된다. 하지만 선생심의 철학적 사유는 선생님의 삶 속에 녹아들어 사유와 삶의 간격이 자꾸 줄어갔던 것은 확실하다. 그 과정은 물론 철학적 사유를 초극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철학적 사유의 중심에 ‘무’한 글자가 자리 잡은 50대 중반 이후 선생님은 불교에 귀의하여 염불과 참선에 몰두했을 뿐만 아니라, 일상적 행동까지도 젊은 시절과는 현저히 달라져 차분하게 가라앉아 갔다.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젊은 시절에도 남보다 잘난 체하고자 하는 마음이 별로 없었다. 선생님과 나의 결정적 차이가 거기에 있었다. 선생님은 연구실에서 사색과 명상에 몰두하다가 문득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기쁨에 넘쳐, 직접 내 연구실에 와서 당신의 생각을 말해주곤 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굵직한 저술을 쏟아내면서도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 같으면 잘난 체하며 목을 힘을 주고 남들을 무시할 터인데, 선생님은 늘 별 것 아니라는 투였다. 모든 것이 덧없음을 절실히 깨닫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자세였다.

선생님은 누구한테나 겸손했다. 아무리 하찮은 사람의 말이라도 귀를 기울여 들었다. 제자 교수들에게도 늘 존댓말이었다. 심지어 조교들한테도 폐를 끼치지 않을까 조심할 정도였다. 나이가 들수록 말씀의 길이가 좀 늘어나긴 했지만, 예의에 어긋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권위의식 같은 것은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

정년 이후에야 강연요청이나 원고청탁이 빈번해졌다. 선생님이 어용교수라는 것을 잘 모르거나 알더라도 개의치 않고 선생님의 철학적 사유에 매료된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나는 선생님의 건강이 염려되어 선별해서 받아들이면 좋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은 대뜸 “내가 뭔데” 하면서 누가 부르건 최선을 다했다.

선생님은 천재였다. 어려운 책을 읽고 소화하는 능력이 보통 학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선생님이 공부하는 걸 보면 나는 삼류였다. 하지만 선생님은 진심으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의 마음은 그렇게 비어져 있었다. ‘김형효’라는 세 글자는 그렇게 선생님의 의식에서 지워지고 없었다. 선생님은 지난 2월 24일 훨씬 이전에 속세를 떠난 건지도 모른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

정년을 하고 몇 년 뒤 2008년 선생님은 폐렴으로 한 달 정도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맸다. 1987년 정신적 충격 이후 20여년만의 신체적 충격이었다. 이 충격으로 선생님은 건강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선생님으로부터 “철학은 필요 없다”는 말을 그 즈음에 들었다. 그리고 2013년 여름부터 치매증상이 본격화되었다. 그해 가을 선생님을 위해 한국학대학원에 강의를 개설했다. 선생님의 마지막 공식 강의였다. 나를 포함해서 4명이 청강했다.

제대로 된 강의가 될 리 없었다. 선생님은 즐거운 듯도 하고 슬픈 듯도 한 미소를 띠우며 예의 그 해탈한 표정으로 추억에 잠긴 채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강의시간에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경남 의령 섬진강가에서 겪은 어린 시절의 체험은 선생님의 무의식에 새겨져 선생님의 철학적 사유의 바탕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왠지 울컥하는 감동이 밀려왔다.

40년 전 서강대 학생시절 선생님의 강의를 듣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서 강의실을 뛰쳐나온 적이 있었다. 선생님한테는 늘 나를 울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그것 때문에 지금껏 선생님을 따라다닌 건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부처님을 닮아가고 있는데, 나는 왜 선생님을 생각하면 울컥하는 것일까.

선생님은 세상의 악 앞에서 너무 진지하게 고민하는 근육질의 남자를 조각한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신라의 “미륵반가사유상”을 좋아했다. 선생님은 “세상을 구하는 것은 고뇌에 찬 진지한 얼굴이 아니라,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이라고 쓴 적이 있다(‘마음혁명’, 2007). 더 나아가 선생님은 “무념으로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성공한다.”고도 말했다. 무념무상의 마음이 온갖 갈등으로 가득 찬 한국사회를 고요히 안정시키는 지름길이라고 선생님은 믿었다. 손자를 끔찍하게 좋아했다는 점에서 보통 노인네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선생님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나라를 염려했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은 마음을 텅 비워 무를 체득한 자의 신체적 표현이다. 선생님은 루뱅대학에서 함께 유학했던 사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늘 그런 얼굴로 왼 종일 말없이 칩거했다. 한 달에 한 번 선생님을 좋아하는 몇몇 분들이 선생님 댁에 모여 사모님과 함께 담소를 나누곤 했다. 선생님은 묵묵히 듣기만 하다가, 이따금 자신의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예전의 그 ‘김형효’는 아니었다. 선생님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고, 이제는 선생님을 좋아하는 그 분들이 ‘김형효’가 되어가고 있었다.



●치매,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흙은 사유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흙은 무와 다르지 않다. 치매는 사유의 결핍 혹은 부재란 점에서 흙과 닮아 있다. 선생님의 치매 또한 선생님이 흙으로, 무로 돌아가는 과정의 한 변종인지 모른다. 나는 말년의 선생님을 뵐 때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음을 달랬고, 막상 돌아가신 다음에도 슬퍼하지 않았다. 슬퍼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으니까.

내가 슬퍼해야 할 것은 ‘선생님의 죽음’이 아니라, 어느 모로 보나 선생님에 훨씬 못 미치는 ‘나의 삶’이라고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자꾸 목이 메어오는 것은 왜일까. 내가 아직 마음을 비우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내가 선생님을 너무 좋아해서일까. 선생님은 세상으로부터 응분의 대접을 못 받았지만, 참 귀한 분이었다. 참 귀한 분이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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